
라이언 레이놀즈가 소유한 Aviation 진.

라이언 레이놀즈가 소유한 Aviation 진.
원제는 predestination (2014).
듀어스로부터 협찬을 받았는지 굳이 시간여행을 하는 와중에서 놓지 않고
노골적으로 라벨을 드러낸다.
듀어스 12년. 퓨어 몰트.



이미 한 번 본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다시 본 날
자기 전, 12시즌에 달하는 [빅뱅 이론]중 한 편을 보는데
메릴 스트립 이름이 등장할 확률은 얼마나 될까.
그래서 우리 인생에 신이 개입하는 순간이라는 얘기는 아니고
(신이 고작 이런 사소한 장난으로 본인의 존재를 알릴 이유가 없지)
이만큼 잘 일어나지 않을 법한 일도 일상에서 종종 마주하게 된다는 것.

매독에 걸린 주인공에게 심심한 위로를 담아 따르는 제임슨.

약을 타러 병원 방문.
얼마만이냐 물었더니 6개월 만이란다.
세월도 빠르고, 그간 병원을 안 간 것도 바보같고.
어떻게 지냈냐 해서 좋지 않았다고, 가만히 있어도 불안하다고 했더니
길게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일단 약을 먹고 2주 후에 또 얘기하자 했다.
사실 약을 안 먹고 싶어서 그런 것이지 약을 먹으면 별 문제가 없지.
아무튼 지금의 나는 약으로 좀 후드려패서 과민함을 누그려뜨려야 하나보다.
프로작을 복용하면 괜찮아지겠지.
프로작이니까.
정말 제 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한 이틀.
하도 오랜만에 술자리를 가져서인지 방구석 노인네 회고록도 아니고
묻지도 않았는데 자백하는 피고처럼 안 해도 될 말이 너무 많았다.
집에 오자마자 후회가 밀려오고 어쩔 줄 몰랐다.
이제부터라도 말의 무게를 생각하고, 가급적 내뱉지 말자.
오히려 귀 기울여 듣고, 질문을 많이 하자.
현대카드 스토리지 전시 이벤트를 위해 펼쳐 본 1977년 12월의 플레이보이지.
술 담배 광고가 정말 빼곡했다.


















귀인과의 티타임을 앞둔 오후.
밖을 나오니 성큼 다가온 여름이 맞이했다.
그럴 줄 알고 아끼는 파인애플 셔츠를 입었다.
방 정리 중 나온 쓰레기도 분리수거했다.
그간 무슨 대단한 미련이었는지 버리지 않았던 애플 제품의 박스들을 자루에 후두둑 떨어뜨렸다.
디스크 조각 모음을 마친 사람마냥 산뜻한 마음으로 발을 내딛었다.
목적지는 지하철로도 얼마 안 됐다.
그런데 갑자기 또 생각났다.
잠을 못 자면 공황이 온다는.
물론 그 말을 방송에서 한 의학 박사는 그러니 잠을 충분히 잘 자두라는 얘기였겠지만
현대인에게, 특히 매일이 불안인 사람에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당연히 충분히 못 잤고, 그분의 얘기가 일종의 암시로 마음에 박혔다.
세로토닌 분비를 차단하는 신경 물질은 열심히 생산되고
고층 빌딩 옥상의 항공 장애 표시등처럼 특별한 조건이 아니더라도 내내 빨간 빛이 깜빡거렸다.
아니다다를까 지하철 두 정거장을 못 가 결국 공황이 터졌다.
거기서 그냥 잠깐 딴 생각하며 회피했으면 좋은 결과를 맞이했을 텐데.
근데 그러지 못했다. 문이 닫히기 직전 빠져나왔다. -> 1 down
오늘도 패배했구나. 난 왜 매번 패배인가 자괴감이 왔다. -> 2 down
어려운 사람을 만나는데 지각할 것 같다는 우려를 한다. -> K.O.
불안에 사로잡히니 과거 중 최악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도 지하철이었다.
그때처럼 되면 어쩌지, 일종의 사망 플래그 같은 생각을 했다.
약효가 돌기를 바라며 큰 언주역을 위로 아래로 돌아다녔다.
누가봐도 수상할 모습이었다.
좀처럼 나아지질 않아 약을 또 먹었다.
약을 먹었지만 약효가 나타나기까지 대략 20분이 걸리니 그때까지 어쩌지?
무장해제된 사람의 심정으로 더 큰 혼란이 왔다.
마스크 착용으로 인해 걸리적거리는 호흡, 열차가 오가고, 사람들이 바쁘게 다니는
도시의 건조한 소리와 시각적 자극에 힘들어 했다.
결국 걸어가자는 생각에 역 밖으로 나왔다.
열린 하늘을 보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였다.
이렇게 집에 오는 데까지 1시간 45분을 허비했다.
공황이란 정말 뭘까.
비슷한 듯 다양한 면상을 하고 있다.
"그때 그놈인 줄 알았지? 사실 다른 고문관이고 이번엔 내 스타일을 맛 봐라."
공황을 달리 표현할 말들은 생각날 때마다 적어봐야겠다.
그래봐야 경험할 때의 고통을 온전히 전달하긴 어렵겠지만.
요즘 글렌파클라스가 가이 리치 스폰서인가?


잠깐 살다 가는 인생인데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이들을 흠결을 따지지 않고 온전히 맺어진 관계만으로 사랑할 순 없을까.
어째서 매일 보는 사람들에게 제일 엄격한 잣대를 들이미는가.
물론 그만큼 부딪히는 횟수가 많기도 하고
나를 만든 사람들이니 나보다 월등히 앞섰으면 좋겠다는 마음은,
적어도 그 당위는 내가 못나지 않았음을 확신하기 위한 바 아닌가.
유전은 이어진다고 배운 탓에
나의 부족함을 선대에 미루고 마는 못남.
얼마나 스마트폰을 다루지 못하든
얼마나 같은 질문을 반복하든
얼마나 사소한 부분까지 신경을 쓰든
얼마나 비과학적이든
얼마나 막무가내로 주변을 어지럽히든
사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