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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101_동면 준비를 하면 지난 봄 날이 보이더라

배려 2009. 11. 1. 21:15
면역력을 억제시키는 주사제로 강직성 척추염 치료를 하고 있는 요즘, 날씨가 추워지면서 더욱 신종 플루가 만연할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예측은 집 밖에 나가지 말라는 얘기나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가급적 대중 교통을 이용할 때에는 마스크 착용을 하고 시도 때도 없이 손을 씻는데 아무리 그래도 감기 걸린 사람과 일대 일 정도로 만나야 할 때에는 혹시나 혹시나 하는 마음 때문에 앉은 자리가 불편하기 이를 데 없고 나의 노력이 순식간에 물거품이 될 소지가 다분하다. 그동안 가로수길을 왕래하면서 나의 방콕 기질은 많이 치유된 셈인데 이제는 렘 콜하스가 선언했둣이 '자발적인 죄수'가 되어 좀 더 세상이 안정될 때까지 숨을 고르고 있어야 할 것 같다. 그래서 올 겨울은 대부분 집에서 작업을 하려고 준비 중인데 가장 시급한 것은 바로 초등학교 때 부터 쓰던 책상을 버리고 2인 정도가 쓸 수 있도록 만든 길다란 책상이다. 아래 사진에서 보았듯 스캐너, 타블렛, 패드콘트롤이 마치 하나의 기기처럼 샌드위치 모양을 취하고 있고 그림을 그릴 때에는 컴퓨터 키보드를 치워도 간신히 a4 한 장 들어갈 자리 밖에 나지 않으니 조금만 큰 그림을 그린다거나, 채색을 하겠다고 할 때에는 오기사디자인을 찾는 것 외에는 달리 도리가 없다. 그래서 실로 과감하게 1800 x 800(단위:mm) 크기의 아주 심플한 책상을 저렴한 가격에 구입을 하였고 드디어 이 전자기기, 메모장, 카메라, 씨디, 핸드폰, 영수증, psp, mp3, 시계, 외장하드, 공유기, 충전기, 스피커, 액자, 달력...으로 둘러싸인 현대판 슬럼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동면 환경을 구축하겠노라 결심한 것 보다 더 골치아픈 문제는 책장을 반대편 벽으로 옮겨 긴 책상이 들어 설 공간을 마련해주는 작업으로 상당한 노동이 필요한 일이다. 예전에 네덜란드에서 이케아 책장을 조립할 때에도, 거기에 가득찼던 책을 박스에 포장해 한국 집으로 보낼 때에도 삭신이 쑤시는 경험을 했던 바 더 무겁고, 많아진 책들 앞에서 나는 시작도 전에 이미 잔뜩 쫄아 있었다. 그래도 주말이 아니면 책장을 옮길 때 가족의 힘을 빌 수 없으니 조심스럽게 한 뭉텅이의 책을 잡아 바닥에 내려 놓는다. 시작이 반이다-그리고 결국 마지막은 창대하리라는 주문을 읊으며 구체적으로 뭐가 들었는지 아직도 확인 안 된 수 많은 책들을 차곡 차곡 쌓았다. 그러는 틈틈이 메이저리그 월드시리즈의 상황도 확인하니 아주 못 할 일도 아니었다. 한 시간 쯤 지난 뒤 아버지의 도움을 얻어 텅 빈 책장을 반대편 벽으로 옮기자 실로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탄력있는 패딩점퍼를 하나 해 입어도 될 만큼 어마어마한 양의 먼지와 머리카락이 가득하였다. 보이지 않는 미세한 먼지들이 보일락 말락한 틈바구니를 비집고 들어가 수 년동안 빼곡히 쌓인 걸 보니 그야말로 이건 세월이 만든 예술이나 다름 없었다. 나의 머리카락 들이 먼지들의 응집에 조금 일조를 하긴 했지만 어짜피 의도한 것은 아니니 이건 순수하게 자연의 몫으로 돌렸다. 먼지가 없는 세상을 진정한 유토피아로 정의하시는 어머니께서는 마치 공소시효가 말소되기 십 분전에 범죄자의 거처를 기습한 형사처럼 기쁨에 겨워하셨다. 우리가 이렇게 더러운 곳에서 산다느니, 이래서 가구를 2년에 한 번씩 옮겨야 한다느니 장갑 낀 손으로 먼지를 한 움큼씩 훔치실 때 마다 삶의 교훈을 한 마디씩 읊으셨다. 어짜피 몇 년 후에는 다른 쪽 벽으로 간 책장 아래 먼지 마을이 형성되겠지만 당장 눈 앞의 더러움을 제거하신 까닭에 책장을 옮긴 건 아주 좋은 결정이었노라며 흡족해 하셨다.

이제 다시 책을 넣어야 하는데... 그래도 책을 빼는 것 보다는 꽂아 넣는 것이 더 수월한 듯 느껴졌고 가로, 세로 엉망으로 놓였던 책들이 처음처럼 가지런한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물론 나보다 더 꼼꼼한 성격의 사람이었다면 이번 기회에 도서관 같은 배치를 구현했겠지만 나는 가끔씩 원하는 책을 찾아 헤매다 다른 흥미로운 책을 발견하기도 해서 일종의 우연성이 일어날 기회마저 없애긴 싫었다. 대신 조금이라도 더 여유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굳이 가지고 있지 않아도 될 책 혹은 자료들이 있는지 예전 물건들을 뒤적거리게 되었다. 그러다가 대학교 때 들었던 수업에 관한 귀중한 자료들을 재발견 하였고 이젠 플레이 할 이유가 없는 게임 씨디들을 정리한 대신 나우누리 시절 친했던 사람들과 주고 받았던 메일을 발견하였다. 그동안 살면서 아쉬웠던 점 한 가지는 나우누리 텍쳐 시절의 글들을 갈무리 해 놓지 않았던 것이었는데 비록 영양가는 없지만 하루에도 수 없이 싸질러댄 글 들이 가끔 궁금할 때가 있었다. 초등학교 때 써 놓은 일기장을 보며 즐거워 하듯 대학 때의 일상도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 때에는 그런 것들이 소중할 거라고는 왜 생각도 못했나 모르겠다. 그래도 99년에 사람들과 주고 받은 메일들은 텍스트 파일로 백업되어 씨디에 있는 것을 발견하니 나 역시도 책장 옮기길 잘 했구나 칭찬하게 되더라. 메일들의 내용은 아직 일부만 확인 했을 뿐인데 진짜 별 거 아닌 내용들이지만 마치 내가 10년 전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받게 하였고 복잡한 회상에 잠기게 하였다. 메일의 제목은 모두 이상한 숫자들로 코드화 되어서 하나를 읽을 때 마다 파일명에 메일 준 사람의 이름을 적기로 하였다. 지금은 전혀 연락조차 안 하고 어떻게 사는지 관심도 없는 사람이 있고, 지금 더 친해져서 메일을 주고 받을 필요 없이 바로 바로 전화로 해결하는 사람도 있고, 이제는 더 이상 메일을 보낼 수 없게 된 사람도 있었다.

올 겨울은 건강이 특히 염려가 되어 집에서 작업을 많이 해야겠다는 생각이 실로 오랜만에 방 배치를 바꾸는 결과를 낳았고 그와중에 내가 나를 위해 숨겨둔 선물을 십 년만에 찾게 된 즐거운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더욱이 위생은 개선되고 등 뒤로 책장이 위치하니 화상 채팅을 해도 부끄럽지 않겠다. 그냥 곰처럼 조용히 동면할 생각이었는데 아직 열지 않은 메일들이 도토리처럼 쌓여있으니 설치류로 변신을 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이번 대변혁으로 인해 무언가를 정리한다는 것에 대한 새로운 매력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버리거나 보기 좋게 모으는 행위이기도 하지만 잊혀진 것을 환기시키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혹시나 추위가 길어지거나 해도 크게 걱정되지 않는 건 아직 정리해야 할 필름과 사진들이 많기 때문이다. 옛날 냄새 풀풀 풍기는 앨범 하나 골라봐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