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ivial
죽음
배려
2011. 5. 21. 01:05
초등학교때 노스트라다무스의 대예언을 책으로 접한 후 한동안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
그리고 그 때부터 죽음이라는 주제에 대해 남들보다 예민하게 반응하게 되었다.
한 가지 주제에 대해 십 년쯤 생각하다 보면 어느새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될 거라는 예전 스승의 가르침이 있었는데
나의 경우는 일단 주제를 잘못 잡았음에도 인생을 통틀어 답을 내려 하고 있다.
92년과 99년을 무사히 보내면서 이젠 휴거, 그랜드크로스 따위의 종말론을 믿는 순진한 소년에서 벗어났으므로
2012년 마야 예언에는 일말의 관심도 주지 않지만, 실상 죽음이라는 이슈는 생과 사의 우주 법칙으로 구동되는
무빙워크를 탄 이상 어쩔 수 없이 옛날보다 성큼 다가가 있고 여러가지 신체에 내재된 질병 덕분에
또래보다 훨씬 앞에서 죽음이라는 녀석을 마주하게 되었다.
때로는 '아우 입 냄새 정말 쩌네. 좀 꺼져줄래?'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죽음과 가까이 대면하게 되는데
주치의의 의학적인 관점에서는 사실이 아닐지라도 몸으로 체감하고 심리적으로 느끼는 거리감은 그 정도로 밀접해 있다.
과연 '오늘 잠을 자면 내일 눈을 뜰 수 있을까' 따위의 생각을 일상적으로 하는 사람이 내 주위에 있을까.
아직 우리 나이에서 고민할 필요가 없는 것들이 망령처럼 일상에 깃들어 있다.
그러니 어디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기대할 것이며, 하고 싶은 일이 넝쿨째 굴러 들어와도 어떻게 다 수락할 수 있으며,
먼 훗날 수명이 좀 깎일 것을 기꺼이 감수하며 바로 지금 몸을 불사를 수 있겠는가.
그저 아침에 눈을 뜨면 휴 다행이다 싶고, 강의가 끝나면 중간에 쓰러지지 않고 탈 없이 무사히 마쳤음에 감사하고,
집에 도착해서 부모님 얼굴 봤으니 안심이고, 내일도 오늘 같았으면 좋겠다는 마음 뿐.
매일 이런 불안을 안고 사는 것은 아니지만 잦은 불안은 곧 불만이고 불행을 낳는다.
몸과 정신이 모두 건강했다면 훨씬 즐겁고 무모한 삶을 살 수 있었을 텐데.
며칠씩 밤을 새다 설계 마감 전날에는 거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던 20대의 과감함은 더이상 찾을 수 없다.
더 잘 할 수 있었는데 스스로와 타협하며 사는 요즘은 그래서 나답지 못하고 남 보이기에 부끄럽고
달콤한 위로와 동정에 기대게 된다.
이러다 내가 지인들 중 가장 오래 살아남는 사람이 되면 그만한 반전도 없겠지.
'시네도키 뉴욕'의 주인공의 심정을 너무 잘 이해하게 되는 요즘.
내일도, 모레도, 앞으로 수십년 뒤에도... 어머니의 밥 먹으라는 소리에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나는 살아있는 사람이 되고프다.
(누군들 안 그러겠냐마는) 나는 조금 더 살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때부터 죽음이라는 주제에 대해 남들보다 예민하게 반응하게 되었다.
한 가지 주제에 대해 십 년쯤 생각하다 보면 어느새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될 거라는 예전 스승의 가르침이 있었는데
나의 경우는 일단 주제를 잘못 잡았음에도 인생을 통틀어 답을 내려 하고 있다.
92년과 99년을 무사히 보내면서 이젠 휴거, 그랜드크로스 따위의 종말론을 믿는 순진한 소년에서 벗어났으므로
2012년 마야 예언에는 일말의 관심도 주지 않지만, 실상 죽음이라는 이슈는 생과 사의 우주 법칙으로 구동되는
무빙워크를 탄 이상 어쩔 수 없이 옛날보다 성큼 다가가 있고 여러가지 신체에 내재된 질병 덕분에
또래보다 훨씬 앞에서 죽음이라는 녀석을 마주하게 되었다.
때로는 '아우 입 냄새 정말 쩌네. 좀 꺼져줄래?'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죽음과 가까이 대면하게 되는데
주치의의 의학적인 관점에서는 사실이 아닐지라도 몸으로 체감하고 심리적으로 느끼는 거리감은 그 정도로 밀접해 있다.
과연 '오늘 잠을 자면 내일 눈을 뜰 수 있을까' 따위의 생각을 일상적으로 하는 사람이 내 주위에 있을까.
아직 우리 나이에서 고민할 필요가 없는 것들이 망령처럼 일상에 깃들어 있다.
그러니 어디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기대할 것이며, 하고 싶은 일이 넝쿨째 굴러 들어와도 어떻게 다 수락할 수 있으며,
먼 훗날 수명이 좀 깎일 것을 기꺼이 감수하며 바로 지금 몸을 불사를 수 있겠는가.
그저 아침에 눈을 뜨면 휴 다행이다 싶고, 강의가 끝나면 중간에 쓰러지지 않고 탈 없이 무사히 마쳤음에 감사하고,
집에 도착해서 부모님 얼굴 봤으니 안심이고, 내일도 오늘 같았으면 좋겠다는 마음 뿐.
매일 이런 불안을 안고 사는 것은 아니지만 잦은 불안은 곧 불만이고 불행을 낳는다.
몸과 정신이 모두 건강했다면 훨씬 즐겁고 무모한 삶을 살 수 있었을 텐데.
며칠씩 밤을 새다 설계 마감 전날에는 거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던 20대의 과감함은 더이상 찾을 수 없다.
더 잘 할 수 있었는데 스스로와 타협하며 사는 요즘은 그래서 나답지 못하고 남 보이기에 부끄럽고
달콤한 위로와 동정에 기대게 된다.
이러다 내가 지인들 중 가장 오래 살아남는 사람이 되면 그만한 반전도 없겠지.
'시네도키 뉴욕'의 주인공의 심정을 너무 잘 이해하게 되는 요즘.
내일도, 모레도, 앞으로 수십년 뒤에도... 어머니의 밥 먹으라는 소리에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나는 살아있는 사람이 되고프다.
(누군들 안 그러겠냐마는) 나는 조금 더 살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