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봄날, 길어진 머리를 자르러 미장원을 가는 길이었다.
직장에 귀속되지 않은 사람에게 평일 오후 시간이란 뻥 뚫린 도로를 질주하는 버스에 혼자 앉아 있는 것 마냥 사치스러운 순간이다.(이에 비해 휴가를 떠나는 회사원이란 꽉 막힌 도로의 버스전용차로를 달리는 짜릿한 기분이겠지) 기다림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신속한 과정을 예상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보도를 걷고 있을 무렵 두세 발짝 앞에서 왠지 모르게 멈춰서 있는 어린 소녀를 발견하였다. 가방을 어깨에 매고 단정하게 차려 입은 소녀는 요즘 아이답게 곱고 새치름한 얼굴이었다.
무엇 때문에 가던 길을 멈추고 있을까.
미동도 않던 소녀의 눈은 발 밑의 보도 블록에 초점이 고정되어 있었고 나도 호기심에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그녀의 눈길을 따라 시선을 바닥에 던져놓았다. 저런. 소녀의 발 앞에는 방사능이나 태양풍에 노출된 것처럼 비정상적으로 퉁퉁한 개미 한 마리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 나도 소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것은 개미 라기엔 너무 큰 놈이었다. 울룩불룩 단단한 몸은 아령을 닮았고 몇 미리에 불과한 보폭은 심히 무거워 보였다. 좀 더 구체적인 상상이 가능하도록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최홍만 개미였다.
어려서부터 개미집에 물을 흘려 넣어 개미들이 살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던 모습을 즐기고 개미가 물면 얼마나 아플지 체험해 보기 위해 가급적 병정개미들을 찾곤 했던 경험들을 되짚어 보더라도 이만한 크기의 개미는 처음이다. 아이 역시 처음 접하는 크기에 놀라 숨죽이고 있었겠구나 어렵지 않게 이해한 순간 소녀는 조용히 한쪽 발을 들기 시작했다. 가던 길을 고수하던 개미는 어느덧 소녀의 발이 있던 곳까지 이동해왔고. 어. 어?! 설마 그런 거였어? 그래서 멈춰있던 거였어? 그리고는 차마 말릴 수도 없을 만큼 그녀의 반응은 나의 깨달음의 속도를 능가하였다.
쿵.
발이 강하게 지면을 차는 소리가 났고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은 그렇게 끝이 났다. 개미에게는 미처 반항할 틈도 허락되지 않았다. 소녀는 다시 발을 들어 최홍만 개미의 처참한 흔적을 확인하였고 나는 차마 그 장면을 똑바로 보고 싶지 않아 눈을 돌렸다. 바닥이나 아이의 신발 밑창에 납작하게 깔려 있을 개미 한 마리의 죽음이 비참해서가 아니다. 방금 전 까지도 살아 꿈틀대던 생명체를 의도적으로 죽인 아이의 잔인함과 목적을 달성한 뒤 얼굴에 퍼지는 행복감에서 다시 한 번 성악설의 손을 들어줄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앞서 잠깐 언급했던 나의 어린 시절도 더 하면 더 했지 소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금은 공포의 대상인 곤충들이 그 땐 살아 있는 노리개였고 파브르의 곤충기를 열심히 읽었지만 저자가 진정 말하고자 했던 바는 시신경을 타고 뇌에 도달하기 전에 증발해 버렸다. 순수 악으로 가득 찬 소년에게 정성스레 그려진 곤충들의 삽화는 어느 근사한 식당 메뉴판처럼 한 끼 포만감을 위한 친절한 매뉴얼 쯤에 불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