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매 20주년 기념 BTTB 앨범에서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라이너 노트
이번에 한국 제작 재발매가 되어 LP를 구매했다.
개인적이고 친밀한 음악
류이치 사카모토의 피아노 솔로 앨범 BTTB를 들을 때면, 나는 항상 이른 새벽 시간에 듣게 된다. 물론, 오후나 한밤중에 들어도 상관은 없겠지만, 내 경우에는 왠지 늘 새벽녘에 혼자 듣게 된다. 나는 보통 아침 5시쯤에 일어난다. 이 시기(5월 하순)가 되면, 동쪽 하늘이 서서히 밝아오기 시작하는 시간이다. 이 시간쯤이면 나는 작업실로 들어간다. 어디든 조용하다. 앰프를 켜고 진공관이 따뜻해질 때까지 기다리며, 뜨거운 블랙커피를 마신다. CD 플레이어에 디스크를 넣고 음악을 들으면서 책상에 앉아 작업을 시작한다. 이런 식으로 나는 한 단계씩 준비한다. 거의 의식처럼. 뜨거운 블랙커피와 특정한 음악은 나에게 꼭 필요하다. 소박한 나만의 습관이다. 그리고 나에게 BTTB는 그런 음악이다.
이 앨범에 담긴 음악을 들을 때면, 어떤 장면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항상 비슷한 풍경이다. 아침 일찍의 학교 건물. 특정한 학교가 아니라 익명의 학교다. 나는 희미하게 어두운 복도를 혼자 걷고 있다. 복도의 천장은 높고, 소리가 멋지게 울린다. 바깥에는 안개비가 내리기 시작한 듯하다. 빗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빗냄새가 아주 희미하게 예감처럼 감돈다. 이른 봄, 길고 조용하게 내리는 그런 비다.
누군가 피아노를 치고 있다. 아마도 모두가 오기 전에 음악실에서 혼자 연습하는 것 같다. 하지만 악보를 보고 연주하는 곡은 아닌 듯하다. 즉흥 연주에 가깝다. 열 손가락이 건반 위를 천천히, 조심스럽게 여행하듯 움직인다. 올바른 음을 찾고, 귀로 그 정확함을 확인하면서. 그렇게 멜로디, 아주 개인적인 멜로디가 쉬지 않고 천천히 짜여진다. 이 멜로디, 이 울림이 내리는 비의 존재와 섞여, 조용하고 신비롭게 내 귀를 통해 마음속으로 스며든다. 그러면 어김없이 궁금증이 살아난다. 피아노를 치는 저 사람은 누구일까? 내가 아는 사람일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음악실을 들여다보는 일은 없다. 그 사람의 소중한 집중, 그 사적인 탐색을 방해하고 싶지 않다. 나는 그저 음악을 듣고, 발소리를 죽인 채 조용히 복도를 걸어간다.
항상 이런 장면이 떠오른다. 익명의 학교 복도, 그리고 그때쯤이면 내리기 시작한 익명의 비.
음악적으로 BTTB는 푸랑크나 사티의 음악, 혹은 포레나 샤브리에의 음악을 떠올리게 한다. 스타일이나 소리가 특별히 비슷한 것은 아니지만, BTTB가 공간 속에 존재하는 방식에서 이런 음악 세계들이 생각난다. 물론 라벨이나 드뷔시의 음악도 훌륭하지만, 오래 듣다 보면 그 풍요로움과 적당한 흔들림의 부재에 때때로 지쳐버린다. 그럴 때 푸랑크, 사티, 포레를 들으면 안도감을 느낀다. 마치 친한 지인의 집을 오후에 방문해, 햇살 가득한 발코니에 누워 정원을 바라보는 듯한 친밀함. (정원에 진달래가 만개하고, 옆에 커다란 고양이가 낮잠을 자고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
그래서 한동안 푸랑크에 집착했던 것 같다. 아니, 오히려 이런 음악이 존재할 수 있는 세계에 강하게 끌렸던 것 같다. 우리는 이런 음악을 ‘개인적인 기원에서 나온 음악’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이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음악. 소리 없이 내리는 섬세한 비처럼, 어느새 마음속에 스며드는 음악. 나는 이런 음악을 소중히 여기고 싶다. 물론 브루크너나 말러의 음악도 훌륭하지만, 세상의 모든 음악이 그들 같다면 우리는 숨을 쉴 수 없을 것이다.
개인적이고 친밀한 음악-누군가(익명의 누군가)가 아침 일찍 학교 피아노 앞에 앉아 멜로디를 짜고, 화음을 탐색한다. 높은 천장과 비의 기운이 감도는 공간을 서서히 채우는 음악. 그러나 필요한 곳에는 여백을 남기는 음악. 가끔은, 아니 어쩌면 언제나, 우리는 이런 음악과 이런 존재 방식을 필요로 한다. 새벽의 뜨거운 블랙커피와 오후의 낮잠 자는 고양이만큼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