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구입하게 된 건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로 인한 현기증을 해소시키기 위함이었다.
정신분열적인 글로 인한 불쾌함을 소위 '청아'하다는 에쿠니 가오리의 문체로 위로받고 싶었다.
에쿠니 가오리의 책은 '반짝반짝 빛나는'과 '호텔 선인장'을 읽었었는데, 사실 두 책에 대한 개인적 감상이 너무 극명하게 달라서 이 작가의 책을 더 읽어야되나 의구심에 휩싸여 있었었다. 하도 오래전에 읽었던 책이라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반짝반짝 빛나는'의 경우 아이러닉한 설정과 담담하게 풀어내는 방식에 맘에 들었었던 것 같다. '호텔 선인장'의 경우는 조물주의 영역을 벗어나 기가 찬 캐릭터 설정과 다다이즘을 방불케하는 무의미한 내용에 뒷통수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대신 '호텔 선인장'에서는 벨기에의 아르누보 양식 건물들을 그린 정성어린 삽화가 더 인상적이었다. 마치 요시모토 바나나의 글보다 요시토모 나라의 삽화가 더 맘에 들었던 것 처럼.
낙하하는 저녁은 기본적으로 실연에 대한 책이다.
하지만 예의 에쿠니 가오리 글이 그렇듯 헤어짐 조차 정적이다. 기름기가 전혀 없는 닭가슴살 처럼 퍽퍽하고 무미건조하다. 그녀에게는 사랑도 죽음도 실연도 모든 극적인 상황이 그렇다. 마치 별 사진을 보는 것 같다. 30초만 셔터를 열어 두어도 북극성을 중심으로한 빛의 궤적이 남을 정도로 천체는 빠르게 돌고 있는데 육안으로는 인식이 어렵다. 수 시간이 지나서야 아 벌써 이만큼 왔는가 싶을 정도로 그 속도는 느리면서도 순식간이다. 더군다나 태양이나 달 같이 초점이 하나로 모이는 절대적 존재가 있다면 모르겠지만 별은 그 수많은 다른 별들로 인해 그냥 '별'이란 말이 복수나 다름없다. 일상은 그렇게 수많은 별들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고 헤어짐이야 그저 그 중에 조금 더 반짝이는 하나의 별에 불과하다. 에쿠니 가오리의 '낙하하는 저녁'이란 의미도 이런 나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어슴프레 땅거미가 깔리는 듯 하다가 어느새 검은 밤이 발치까지 떨어졌을 때의 당혹감. 그래서 그런지 유난히 일상에 대한 묘사가 많다. 딱히 주인공의 심리를 반영하는 것 같지도 않고 메타포가 되지도 못하는데 집요할 정도로 주변 사물을 들춘다. 그러다가 어느새 인물에 초점이 맞추어지나 싶으면 여지없이 추억이라는 시체를 해부해서 현미경으로 들여다본다. 제품 매뉴얼을 보는 듯한 시선이 우리에게는 없는 일본인의 습성인가 싶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끝으로 에쿠니 가오리의 책은 더 이상 읽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말라 비틀어진 문체가 맘에 안 들어서는 아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대담한 상황 설정에 거부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남자친구와 헤어지게 된 계기를 제공한 여인과의 동거. 더욱이 은근 싫지 않다가 결국 살갑고 정겹게 되는 이해 안 가는 인물 관계가 나와는 맞지 않았다. 이건 '반짝반짝 빛나는'에서의 기묘한 동거와는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일말의 공감이 가지 않는...
또한 책의 결말도 많은 불만을 토해내게 하였고 결정적으로 변역조차 오류가 듬성 듬성 보였다.
간결한 문체가 장점이 되는 이런 식의 소설은 전체를 읽기 보다는 그 날 그 날의 기분에 맞춰 몇 단락 읽는 것이 더 효과적일 듯 싶다. 그도 그럴것이 작가가 최초에 적은 몇 줄이 책을 다 읽은 지금까지도 가장 인상적인 글이었으니까 말이다.
"이상한 말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나, 다케오하고 두 번 다시 안 만날 수도 있고,
다케오하고 새롭게 연애할 수도 있고,
지금 당장 다케오하고 같이 잘 수도 있어."
★★☆나, 다케오하고 두 번 다시 안 만날 수도 있고,
다케오하고 새롭게 연애할 수도 있고,
지금 당장 다케오하고 같이 잘 수도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