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에는 국가건축가라는 제도가 있다. 탁월한 역량을 지닌 건축가 한명을 선정해 최대 5년동안 국가에서 시행하는 공공 사업에 대한 자문 역할을 담당하는 것으로 왕 직속 건축가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도시 계획, 건축, 조경, 실내 건축 분야에서 전문가적 견해를 제시하고 정치가들의 파워 게임을 견제하는 위치에 있음을 감안한다면 건축대통령 혹은 국가대표건축가라고 생각해도 좋을 정도이다. 이 국가건축가 제도에 관해 최근에 작성한 짧은 소개글을 첨부해본다.

Rijksgebouwdienst


공공시설관리국에 해당하는 Rijksgebouwdienst는 헤이그에 위치한 VROM(주택건설환경부)에 속해 있으며 정부의 각 부처들이 맡은 바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쾌적한 업무 환경을 제공하는데 일차적인 목적을 갖는다. 정부 청사, 국책 연구소, 고대 유적, 고성, 감옥, 박물관 등 총 11만 명을 위한 2,000여 건물을 책임지고 있기 때문에 네덜란드에서 가장 큰 부동산 회사 중 하나인 셈이다. 이 공공시설관리국의 수장이 Rijksbouwmeester(국가건축가)로서 건축, 건설, 건축 유산, 인프라, 건축 정책, 시각 예술 전반에 걸쳐 중앙 정부의 자문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2006년을 기해 200주년을 맞이하며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국가건축가 제도는 왕권의 성립과 동시에 활약한 왕립건축가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직접 디자인을 수행하던 관습에서 벗어나 국가핵심공공사업에 대해 적절한 건축가를 지명하고 독립적인 자문 위원으로서 활동하는 현대적 기능은 1950년대 말부터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최대 5년의 임기를 갖는 국가건축가는 jo coenen과 mels crouwel을 거쳐 2008년에 liesbeth van der pol로 임명되었다


이번에 건축가협회의 의뢰를 받아 네덜란드 건축 정책과 관련 기관에 관한 글을 정리하다보니 네덜란드에는 건축을 정책적으로 보조하기 위한 기구가 참으로 많이 존재한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건축협회, 건축가협회, 건축사협회는 물론이고 연구소, 정보센터, 홍보센터, 기타 젊은 건축가들을 지원하기 위한 공모전, 장학제도, 기금 등등 그야말로 건축가는 디자인만 열심히 하면 되는 아늑한 환경을 제도적으로 만들어준다는 느낌이다. 네덜란드의 건축이 세계적으로 주목받을 수 있는 이유가 뭐든지 하면 된다고 믿는 도전 정신과 건축을 국가가 내세울만한 상품으로 생각하는 점 외에도 이러한 생각을 실천 가능하게 서포트하는 정책에 있음을 간과하면 안 된다.  

그렇다고 우리도 따라서 똑같이 국가건축가를 뽑자고 한다면 그건 또 아니올씨다다. 네덜란드 국가건축가가 왕정 건축가에서 시작했다고 하지만 우리 나라 국민 정서와 정치인들의 속성을 고려할 때 대통령이 어느 날 갑자기 만드는 제도에 대해서는 신뢰가 가지 않는다고나 할까. 분명 디자인 역량보다는 정치 사상으로 한차례 선별 작업이 있을테고 그 밖에 학연, 지연, 혈연 등등을 따지고 들어가 실적은 어느새 제일 나중에 고려되는 조건으로 밀릴 것이다. 아무런 제도적 장치와 선험적 근거 없이 다짜고짜 카피하는 제도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 보다는 국민 저변에서 공론을 모아 우리가 사는 터전에 대한 참여 정신을 불러 일으킨 후에 그 탄탄한 기반을 토대로 한 단계씩 성장하게 하는 bottom up 방식을 채택해야 한다.

그런고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네덜란드와 같이 chief government architect(국가건축가)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가장 최소 단위의 주거 환경을 관장할 수 있는 (cheap) village architect(동네건축가) 제도를 제안하는 바이다. 건축관련 고등교육을 이수하고 한 동네에서 7년 이상 거주한 사람으로 애동심이 충만하고 민심을 얻을 수 있는 건축가가 있다면 아주 제격일 것이다. 정치, 경제적 이슈에서 보다 자유롭고 사회 참여적인 성격을 강조하기 위해 업무에 관한 보수는 생필품(쌀, 물, 우유, 계란, 밀가루...)으로 제공되며 주민센터에 사무실을 마련해 주면 괜찮은 시작이 아닐까 싶다. 동네건축가가 모여 구역건축가가 되고 또 이들이 모여 도시건축가, 도건축가, 국가건축가로 자연스럽게 성장하는 과정을 꿈꿔본다.

그렇게만 된다면 서초구 반포동은 내가 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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