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티룩스(noctilux)는 라이카 렌즈 중 두번째로 밝은 렌즈의 이름으로 조리개 수치가 무려 1.0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가장 밝은 렌즈로 통했으나 최근 70년대부터 꾸준히 지켜왔던 설계가 변경되고 조리개 값이 0.95로 더 떨어진 제품이 등장하면서 오래도록 지켜온 타이틀을 신형 녹티룩스에 물려주었다. 하지만 신형 녹티룩스는 색수차를 대폭 줄인 성능과 그에 걸맞는 8000유로라는 거금으로 출시된다고 하니, 과연 색수차로 인해 전해지는 묘한 느낌을 사랑하는 기존의 유저나 녹티룩스를 써보고 싶었으나 가격이 부담스러웠던 잠재적 수요자들 모두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분위기이다.

라틴어에서 '밤'을 뜻하는 'nockte'와 '빛'을 의미하는 'lux'를 합성시킨 녹티룩스는 '밤의 빛'이라는 이름만큼 미세한 빛이 새어나오는 어두운 장소와 좋은 궁합을 이룬다. 크리스마스 트리와 같은 조명, 자연광으로만 채워진 실내, 무수한 가지들이 현란하게 빛과 그늘을 드리우는 나무 밑, 햇빛이 산산히 부서지는 파도를 배경으로 할 때 렌즈는 가장 아름다운 결과물을 보여준다. 하지만 지나치게 밝은 렌즈인 만큼 해가 쨍쨍한 대낮에는 nd필터를 껴서 셔터 스피드를 줄여야 하고 셔터막이 타는 참사를 막기 위해 역광은 가급적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또한 RF카메라의 50mm 렌즈 답지 않게 크기가 상당하며 무게가 900g에 이르기 때문에 카메라와 미적으로 아름다운 조합이 되지도 못 할 뿐더러 렌즈를 바디에 마운트 한 채로 덜렁 덜렁 매고 다닐 시에는 마운트 부위가 휘어지니 어느모로 보나 주의해야 할 점들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그 불편하다는 라이카에서 가장 불편한 렌즈라 할 수 있으니 어지간해서는 녹티룩스만 쓰는 유저들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나마 모든 어려움을 인내하고 단지 좋은 혹은 특이한 결과만을 위해 렌즈를 영입하기로 결심한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물량 부족과 그로 인한 최근의 가격 상승은 끝까지 심신을 불편하게 만든다.

어쨌든 녹티룩스는 내가 라이카에 대한 꿈을 갖게 된 5년전 부터 그 존재감을 잘 알고 있었다. 별별 놈의 기념 바디와 렌즈들을 만드는 라이카의 상술로 인해(그러면서도 회사 재정은 계속 악화되니 카메라 시장은 한국의 아파트와 같이 이제는 디지탈이 아니면 답이 없을 정도이다.)  출시된 모든 렌즈들을 파악하기란 무척이나 머리 아픈 일이지만 실제로 구매를 고려해 보지는 않았더라도 6군8매라던가 녹티룩스 정도의 이름은 전설과 같이 회자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나 문제는 그 놈의 가격이었다. 100만원 정도의 렌즈도 겨우 겨우 샀던 시절, 300만원에 달하는 렌즈를 마음에 둔다는 것은 너무도 무책임한 짓이었다. 그저 시간이 지나고 돈을 모으다보면 언젠가 한 번쯤은 저 렌즈를 만질 날이 오리라는 희망만을 지닌 채 렌즈의 시세나 결과물 따위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녹티룩스의 기존 모델이 단종되고 환율이 상승하면서 최근 2년 사이 가격이 두 배 이상 상승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 하였다. 엄연히 중고라는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가격이 하락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는데 라이카 제품들은 단순한 물품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주식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자동차나 컴퓨터와 달리 아무리 사진을 찍어도 그 사용 빈도에 비해 가격이 하락하는 정도가 크지 않고 심지어 오르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실컷 쓰고도 관리만 잘 한다면 배가 넘는 가격으로 팔리는 녹티룩스는 그야말로 우량주와 다를 바 없다. 게다가 가격이 높건 낮건 물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장터에 나오는 족족 팔리기 마련이다. 

다시 녹티룩스에 불타오르게 된 것은 사진을 취미와 업의 중간 단계로 설정한 아주 최근의 일이다.  좀 더 생산적인 활동과 매너리즘에 빠진 스스로를 구제하기 위해 장비에 변화를 주는 것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해서 애초에 감히 녹티룩스를 넘보았던 것은 아니다. 일단은 35mm보다 50mm 렌즈로 찍는 것이 내 성향에 가깝다는 것을 깨달았고 실내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찍을 수 있는 밝은 렌즈를 찾는 것이 최초의 단서였다. 건축 사진에 적합할 뿐 아니라 때로는 세상을 미니어쳐로 축소해 버리는 TS렌즈를 고려한 적도 있으나 그러기 위해서는 카메라 바디까지 교체해야 하는 불편함이 뒤따른다. 건축 사진에 대한 요구가 아직까지는 절실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과감한 결단을 내릴 필요는 없었다. 

외국에서 한창 즐거웠던 사진 생활이 한국에 오면서 갑자기 식어버린 것도 렌즈 선택에 큰 단서를 제공하였다. '사진은 외국'이라는 우스갯 소리를 할만큼 이국의 풍경들은 언제 어디에서나 훌륭한 피사체를 제공하였다. 그러한 부유한 환경에 익숙해졌던 까닭인지 서울에 오자 여간해서는 셔터를 누를만한 상황을 만나지 못했다. 하늘은 매연으로 뿌옅고 개성 없는 아파트 숲이 눈치 없이 프레임 안으로 끼어 들었다. 거리는 사람과 차량으로 너무 복잡했고 건물에는 천박한 간판과 어지러운 전선들이 가득하였다. 인터넷의 과도한 보급으로 신상 정보가 쉽게 노출되기 때문인지 카메라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폐쇄적 이었다. 무엇을 더해야 할지, 무엇을 빼야 할지 고민하기도 귀찮았고 그렇다고 해서 맘에 드는 결과를 만들지도 못하였다. 그러다가 결국 스스로 결론 내리기를 피사체를 과장해서 하나의 메세지만을 전달하거나 아예 흑백 사진을 통해 현기증 나는 일상을 단색으로 중화시키자는 것이었다. 한 군데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서는 접사렌즈나 망원렌즈가 필요할테고 피사체를 제외하고는 모든 배경이 아웃포커싱으로 뭉개져 이 역시 보기 싫은 풍경들을 자연스럽게 생략해 버리기에 아주 제격이다. 50mm 화각으로 스냅에도 적합하고 조리개 수치가 현저히 낮아 아웃포커싱 능력이 뛰어나며 흑백에도 발군인 제품을 찾게 된 데에는 이렇게 길고 긴 사연이 깔려 있었다. 

flickr의 강력한 검색과 태그 기능으로 각종 렌즈의 결과물을 비교하는 일이 무척 수월하였다. 게다가 라이카 m마운트에 f1.4 이하의 제품을 찾는 것은 애초부터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아주 쉽게 말하자면 결론은 역시 f1.0 녹티룩스 였다. 물론 최초의 녹티룩스(소위 1세대라 불리우는)는 조리개 수치가 1.2이며 부담스럽지 않은 크기였으나 결과의 호불호를 떠나 일단 희소성 만으로도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 였다. 현행 녹티룩스는 무시무시한 가격에서 중고가가 정체됐고 70년대에 생산된 2세대 마저도 나의 물건 이것 저것을 팔고 앞으로 벌 돈까지 미리 예산에 책정해야 하는 정도였다. 그리하여 녹티룩스의 대안이 될만한 렌즈들을 뒤지고 다녔는데 그 결과가 무척 흥미롭다. 

일단 각 렌즈사들에서 기술력을 자랑하기 위해 한때 렌즈의 밝기에 집착하던 때가 있었다. 그런 경쟁이 언제 누구의 승리로 끝났는지는 모르겠으나 캐논과 슈나이더에서 f0.95의 렌즈를 만든 바 있다. 생긴 것도 어정쩡하고 초점 맞추기도 어려워 보였으나 대체로 그 결과 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심지어 슈나이더사의 제논 렌즈는 녹티룩스보다 더 맘에 드는 결과를 보여 나의 혼을 쏙 빼 놓았었다. 하지만 굳이 어려운 길을 택한 나를 보란듯이 렌즈를 구하기란 살아 생전에 불가능할 듯 보였고 설사 렌즈를 손에 넣더라도 일본 장인의 힘을 빌어 m마운트로 개조해야 하는 또 하나의 산이 높이 솟아 있었다. 때문에 위의 렌즈를 쓰고 있는 사람들도 모두 일본인이고 그들 자신이 그 렌즈를 손에 넣은 것을 하나의 기적으로 평가할 정도였다. 게다가 일본에 산다는 렌즈 개조의 달인은 해외에서의 주문을 전혀 받지 않았으며 렌즈가 완전한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몇 번이고 그 사람을 찾아가 재조정을 받아야 한다니 이건 부대비용이 렌즈 구매가의 몇 배를 상회할 지경이다. 

조리개 수치 1.2 로 다른 비교 대상들에 비해 다소 밀리더라도 합리적인 가격과 인상적인 결과물을 보장하는 헥사논 50mm 역시 훌륭한 대안이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은색 제품만 존재하며 나름 한정 생산인지라 이 역시 물건을 구하려면 많은 날들을 강태공처럼 흘려 보내야 한다. 무릇 카메라와 렌즈라는 것은 귀한 인연과 같아서 언제 어떻게 만나게 될지를 예상하기 힘든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 운명을 거스르는 유일한 길은 결국 현찰 뿐이고 따라서 '사진은 외국'이기도 하지만 '사진은 돈'이라는 또 하나의 금언이 나오게 된다. 

한 곳에 꽂히면 정신을 못차리는 성격 탓에 새로운 렌즈를 향한 간절한 마음은 밤에 잠을 설치게 할 정도이고, flickr에서 사진만 보다 하루가 꼴깍 넘어가 버리는 날이 반복되다 보니 심신이 피로해지고 해야할 업무에 지대한 악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어짜피 나의 마음은 녹티룩스로 굳어진 듯 했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중고 장터 시세가 샵의 그것을 넘어섰다. 서울의 카메라 샵을 다 뒤져보아도 실사용기로 적합한 녹티룩스는 단 한 대 뿐이었고(두개가 더 있는데 이들은 모두 소장용과 다름 없었다.) 이마저도 금새 누군가의 손으로 넘어갈 듯 보였다. 앞서 말했듯 어짜피 우량주인 까닭에 사서 쓰다가 정 이건 나와 안 맞는다거나 턱없이 과분하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때 되팔아도 전혀 손해볼 것 같지 않았다. 

장고 끝에 내린 결론인지라 막상 물건을 구매하는 과정은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나고 말았다. 렌즈를 손에 넣고도 스스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로 얼떨떨 했으며 아직 테스트 샷도 한 롤 찍어보지 못한 까닭에 의심 반, 두려움 반이다. 원하는 상황에서 샷을 날려보고 나온 결과에 따라 그동안의 모든 감정이 정리될 터인데 부디 만족스러운 구입이 되었기를 바랄 뿐이다. 다행이 예전에 쓰던 렌즈는 요즘 국내 라이카 시장의 부족한 수급으로 인하여 내가 구입할 때 보다 더 높은 가격으로 판매되었고 이는 녹티룩스를 구입하는데 큰 보탬이 돼 주었다. 그동안은 별 생각 없이 아무렇게나 카메라 용품을 보관해 왔었는데 언젠가 되팔지도 모르는 그 날을 생각한다면 보관에 좀 더 신중을 기해야 하겠다. 그래서 덩달아 이번 기회에 습도와 온도를 유지시켜주는 카메라 보관함을 구입했는데 카메라나 렌즈에 비하면 그 가격은 전혀 부담스럽지 않은 수준이고 비록 원 바디, 원 렌즈의 단촐한 구성이지만 이제서야 본격적으로 찍사로서의 분위기가 방에서 풍겨나오기 시작했다. 

결국 내가 선택한 일이지만, 이로써 올 한 해는 행복할 것이라는 예상이 얼추 맞아가고 있다. 고작 렌즈 하나에 평생 꿈이 이루어 진 듯한 희열을 느끼는 보잘 것 없는 인생이지만 지금은 그냥 이대로가 좋다.  

녹티룩스로 찍은 사진들을 보고 싶다면 클릭!
캐논 f0.95로 찍은 사진들은 여기에서!
슈나이더 제논 f0.95는 여기로!
헥사논 f1.2는 여기!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