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보다 사회 생활을 일찍 시작하고 그 힘든 연예계에서 아이돌로 특별한 삶을 살았기 때문일까. 유노윤호가 공중파를 통해 인생의 진리를 설파하는 장면은 사뭇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지루한 수업으로 쌓인 스트레스를 누구랑 어디서부터 풀어볼까에 대한 결론을 내는 것이 고작 방년 스물 셋의 나이에 내가 일상을 대하는 가장 진지한 순간 이었음을 되돌아 볼 때 금새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부끄러움 감정이 일었다. 방과 후 동기, 후배들과 신촌 바닥에서 하는 거라고는 그저 당구장, 게임방, 만화방을 전전하는 것이 전부였고 끼니를 때우는 것은 그 세 군데 중 어느 곳에서라도 가능했기 때문에 생존에 관한 위기 의식같은 건 느낄 이유도 없었고 딱히 인생에 대해 고민의 필요성을 발견하지 못했다. 나는 특별히 잘나지도 않았으며 그로인해 큰 욕심도 없었다. 학생 신분으로서 하루 하루 강의 듣고 남들처럼 모나지 않게 살다가 졸업하면 취직해서 평범하게 사는 것이 인생의 자연스러운 순리라고 생각했나보다.(그 댓가인지 지금의 인생은 평범은 커녕 그야말로 엉망진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 질문을 던졌다면 더 생각해 볼 필요도 없이 이렇게 단언했을 것이다. 
"당신의 길은 무엇이죠?"
"아 저는 역시 우라죠."
"아니 그게 아니라 인생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글쎄요...쎄뻑인가요? 그리고 간간히 뽀록?"

*우라: 당구 치는 방법 중 하나. 빨간 공의 가장자리를 맞춘 후 쿠션을 세번 때리는 안정적 경로. 초구는 무조건 우라로 친다.
*쎄뻑: 재수, 우연, 행운, 요행 등을 일컫는 말
*뽀록: 쎄뻑의 유의어. 상대의 운을 칭찬하고 싶을 땐 주로 쎄뻑을, 폄하하고 싶을 땐 뽀록이라 함. 후루꾸, 뽀로꾸라고도 함.

어쨌든 인생은 럭키아니겠느냐고 조물주에게 모든 것을 내 맡기는 여유만만한 철학을 신봉했던 시절, 동방신기의 유노윤호는 팀의 리더이자 전라도를 떠들석하게 뒤흔든 춤꾼답게 인생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멋지고 펄펙해야 한다는 철저함을 강조하였다. 역시 아이돌은 아무나 되는게 아님을, 철저하게 계획적이고 완벽해야 함을, 상대를 향한 한마디 한마디에 일관되게 담아냈다.

그 뒤로 남 부끄러울 정도만 벗어난 학점을 목표로 평범하게 학교 생활을 하다가 정말 우연한 계기로 그 누구보다도 빨리, 그것도 학교 대표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대우가 좋다는 설계사무소에 졸업도 전에 덜컥 취직이 결정되어 버렸다. 무엇보다도 중요했던 취직 문제가 너무도 쉽게 해결되면서 인생은 쎄뻑이라는 것이 증명된 것과 다름 없으니 이젠 사회생활을 통해 인생의 진리에서 한걸음 나아간 세상의 진리를 찾아도 이르지 않을 방년 스물다섯의 겨울이었다.

회사에서 남들 일 하는 것 보면서 배우는 세상은 참으로 만만치 않았다. 나에 대한 팀원들의 시선이 절대 곱지 않은 이유는 참으로 얼토당토 않은 이유들 이었다. 나는 선후배 관계가 엄격한 고등학교 방송반 출신으로 상명하복, 위계질서, 관료제에 충분히 적응되어 있음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출신 대학교의 이름만으로 이미 나를 어떤 자유분방하고 개인주의적인 인간으로 분류하였다. 마흔 넘어서도 술자리에선 결국 군대 얘기가 오가는 마당에 병역 면제자라는 타이틀은 직장 상사들과의 가장 큰 공감대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고 더더군다나 술 마시기를 꺼려하는 지극히 반 한국적 기호까지 겸비했으니 이건 거의 할렘가 한 가운데에서 본인 이름의 영문 이니셜을 딴 티셔츠를 팔고있는 김건국(KKK, 실제 친구 이름이다) 군이나 다를바 없었다. 

신입사원 중 유일한 여자 동기의 애교넘치는 목소리와 아무때나 남발하는 헤픈 웃음으로 인해 나는 업무 능력과 상관없이 그녀와 정반대의 평가를 받게되었다. 무표정은 불만으로, 질문은 말 대답으로, 유머는 건방짐으로 내 뜻과는 전혀 다르게 비춰졌다. 얼마나 억울하고 혼자 외로웠으면 끊었던 담배를 다시 물게 되었던가. 그래도 첫 직장인데, 추천해 주신 교수님 체면도 있는데 여기서 포기하고 싶지 않은 오기로 버텨냈다. 적어도 2, 3년은 경력을 쌓은 뒤에 보란듯이 유학을 떠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더욱이 당시에 담당하던 프로젝트는 신세계 백화점이었기 때문에 백화점에 가서 매장을 둘러보고 옛날 일제시대의 건물을 실측해서 디지탈 도면화 시키는 일은 그 자체로도 너무 즐거웠다. 사회 관계에서 얻은 실망들을 일로써 보상받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 하였다. 

하지만 나도 세상의 진리라고 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지만 25년을 살면서 나름대로 옳고 그름을 저울질 하는 기준이 있었고 그 무게추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바로 선의, 진심, 노력, 정직, 배려등의 가치였다. 그런 줄도 모르고 대선배로서 값비싼 조언을 해주는 척 회식 자리에서 소장이 나즈막히 건넨 얘기는 내 귀를 의심할 정도로 충격적인 것이었다. 
"야, 너 임마 회사에서 승진하고 그럴려면 H대리처럼 술도 잘 마시고 오입질도 잘 해야돼. 알았어? 크크"
아무리 현실이 병들고 희망이 없다고 하지만 스물여섯의 신입 사원에게 오십이 넘은 양반이 회사원으로서 승승장구를 하기 위해 갖추어야 할 덕목으로 술과 섹스를 언급하는 것은 도가 지나쳐도 한참 지나쳤다. 그 때 '난 이렇게 썪은 정신을 가진 소장 밑에서는 일 못하겠소'라며 자리를 박차고 나오지 않은 것을 여전히 크게 후회하고 있다. 그냥 윗사람이고 회식 자리니까 최소한의 예의는 갖추자고 바보같이 참고 있었고 하도 기가차서 찔끔 나오는 눈물을 감추려 맥주잔에 고개를 쳐박았다.

계획에 없이 퇴사를 선언했던 날도 회식이 있는 저녁이었다. 
마침 중요한 공모전에서 우리 팀의 작품이 당선된 까닭에 흥에 겨워 유례없이 소고기를 구워먹었고 앞으로 들어 올 자금들을 생각할 때 주점에서 아가씨들과 단란한 2차 술자리를 갖는 것이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나보다. 그런 자리에서 막내가 으례껏 해야 하는 분위기 띄우는 역할이 싫어서 가능한 한 술을 적당히 마시며(전혀 안 마시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내 주량껏 마시고 싶을 뿐이었다.) 이성의 끈을 놓지 않았더니 소장은 그게 또 그렇게 불만이었나보다. 룸 안에 있는 화장실에 들어가자마자 대놓고 내가 맘에 안 든다고 팀원들한테 반감을 들어냈고 방음이 안 되는 화장실에서 나는 고스란히 그 얘기를 들어야했다. 그때 거울에 비친 지친 표정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그래 이건 정말 아니지 않냐?' 자문을 하였다. 소장의 험담을 못 들은 척 웃으며 화장실을 나온 후 나는 너희가 정녕 원하던 모습이 이것이었냐며 보란듯이 폭음을 자행하였다. 그 뒤의 순간들은 결코 아름답지 못했다. 필름이 끊어진 듯 점멸하는 기억 속에서 나와 나이가 같다던 접대부가 위장에서 거부하는 알콜들을 고통스럽게 게워내는 나의 등을 두드리며 무슨 술을 그렇게 많이 먹었냐며 걱정하는 장면이 빠르게 스쳐갔다. 술자리가 끝난 이후로도 더이상 언급하고 싶지 않은 상황들을 겪어야 했고 건축가가 되기 위한 꿈과 한 인간으로서의 자존심, 그래도 우리는 나름 엘리트 집단에 속한게 아니었나 하는 자부심들은 때마침 쏟아지는 장맛비로 인해 고스란히 씻겨져 가락시장역 어딘가로 흘러 들어갔다. 

월드컵 4강에 대한 흥분이 가라앉을 무렵 세상에 대한 나의 관심과 애정은 저만치 멀어졌고 이 사회 구조에 대한 불신은 열병처럼 온 몸을 뜨겁게 달구었다. 이십오년간 몸 담았던 터전을 떠나기로 결심을 했고 세상의 중심에 나를 가져다 놓고 그 자리에 서서 전혀 다른 시각으로 주위를 둘러보는 계기가 되었다. 모든 것의 근본은 나에서 비롯되었으며 나를 위한 인생, 내가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최선의 길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되었다. 그런 연유로 나 자신의 성향에 대해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였고 뒤늦게 찾아온 사춘기 처럼 고독한 탐구가 소리 없이 진행되었다. 다행히 유학을 준비한답시고 혼자 보내는 시간은 잃어버린 영단어를 하나 하나 기억해내듯 지난 모든 시간을 되짚어 보는 데 충분하였고 거기에서 세상의 진리, 곧 나의 진리에 가깝게 다가갔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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