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께 읽은 '사진의 극과 극'에서는 국문과 출신 여성 카피라이터에 대한 나의 패배감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뭘 전공하셨죠?'
'국문학이요.'
'지금 하시는 일은?'
'카피라이터요.'
'제가 졌습니다.'
뭐 이런 느낌이랄까.
글도 글이지만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책(좋은 책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많은 책)을 읽어 왔는지가 여실히 드러나는 글이었다. 혹자는 그녀의 풍부한 예시에서 지적 허영심을 느낄지도 모르겠지만 fact만을 던져주는 책을 주로 읽어왔던 나로서는 좋은 글귀를 통해 자신의 문장을 풍성하게 하는 능력이 상당히 부러울 따름이었다.

여유가 없어 너무 오랫동안 잡지 못했던 김영하의 신작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에서는 첫 소설 '로봇'에서 부터 글 쓰기에 대한 좋은 가르침을 얻었다. 사실 이번 소설은 조금 달갑지 않은 면이 있다. 책 내용도 모르는 독자들에게 제목을 추천 받는다던지 과연 이 걸 소설이라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에세이틱한 조각들 까지. 마치 instrumental, 가라오케, 디스코, 클럽믹스 등 재활용 곡만 잔뜩 담은 정규 앨범을 산 느낌이랄까. 그래도 '로봇'을 읽고 나름의 깨달음이 있었으니 끝까지 계속 읽을 이유야 충분하다. (게다가 어짜피 팬이라 뭐가 나오던 사는 사람이 되었다.)

하도 내가 소설책을 안 읽어서 그런 것이겠지만 일단 나는 묘사가 너무 약하다. 글을 읽고 상황이 눈 앞에서 그림으로 펼쳐지지 않는다고나 할까. 김영하 작가의 글은 평범한 듯 하지만 현학적인 문장이 아니라서 막힘 없이 술술 잘 읽히고 신기하게도 등장 인물의 경험이 즉각적으로 시각화된다. 마치 영화를 보는 듯한? 이것은 디테일의 힘이 아닌가 싶다. 본인의 체험을 글로 옮긴 것 같은 현실감. 정말 그런 경험을 하지 않고 이런 상상이 가능한 것일까 하는 의문을 불러 일으키는 표현들.
'그렇게 딴생각을 할 때 괄약근을 조이는 것은 수경의 비밀스런 버릇이었다. 그렇게 하면 세상의 모든 나쁜 것들이 자신의 몸속으로 들어오지 못하리라는 이상한 확신이 그녀에게는 있었다.(로봇 중)'
'남자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횡단보도를 걸어가다가 몇 번이고 뒤를 돌아다보는 것을 수경은 거울 코팅이 된 빌딩의 유리로 슬쩍 볼 수 있었다.(로봇 중)'

이런 표현도 참으로 사랑스럽다.
'캐논볼 애덜리의 색소폰 소리는 스피커를 나오자마자 바람 빠진 풍선처럼 바닥으로 가라앉아 사람들의 발길에 차였다.(오늘의 커피 중)'

마지막으로 당연한 얘기지만 단어 공부를 많이 해야겠다. '판독기', '사금파리' 같은 단어는 굳이 그렇게 적지 않는다고 하여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뭐랄까 글로 먹고 산다면 이 정도는 쓸 줄 알아야지 않나 라는 막연한 생각이 든다. 스케치북에 적힌 단어를 말하지 않고 설명만으로 상대에게서 정답을 이끌어 내는 스피드퀴즈를 하는 심정이랄까.
'아 그 뭐지? 왜 그 있잖아. 저기 그 사기 그릇 깨진 조각!'
'아아 사금파리?"
봐라. 얼마나 섹시한가.
소설 쓰기 참 쉽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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