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유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 나는 잠과 관련해서는 남다른 운명을 갖고 태어났음이 분명할 정도로 잠은 인생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어렸을 적에는 누으면 곧바로 깊은 잠에 빠지는 편이었다. 큰 걱정이 없었던 당시의 집안 환경 덕분인지 스스로의 안전을 부모에게 완전히 내 맡긴 정신적 벌거숭이 상태를 자초할 수 있었다. 꼬옥 끌어 안아야만 심장이 두근 반 세근 반 뛰던 곰 인형처럼 반 가사상태나 다름 없었기 때문에 특별히 잠 투정 부리지 않고 부모님께 효도하는 편이었다. 간혹 전화벨이나 초인종 소리로는 깨질 않아서 어머니께서 대낮에 열쇠집 아저씨를 부르는 일이 있었지만 그런 사건은 그저 너 같이 자는 얘는 처음봤다라는 한숨으로 끝이 날 뿐 결코 혼이 나거나 매를 맞아야 할 이유가 되지 못하였다. 어쨌든 신생아도 아닌 것이 뭐가 그렇게나 피곤했는지 틈만 나면 꾸벅 꾸벅 졸다가 눈을 감기 일쑤였고 성적은 나쁘지 않았지만 수업 태도에 있어서는 항상 주의를 받는 편이었다.
나이를 먹으면 점점 잠이 준다고 누가 그랬던가. 대학 입시는 4당 5락이라고 누가 그랬던가. 인류의 오랜 경험이 만들어낸 잠에 관련된 사회적 인식도 나에게 있어서는 보편적으로 적용되지 않는가보다.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취침 시간은 십대 때와 변함이 없고 잠으로 인해 크게 후회할 짓을 만들지도 않았다. 잠 자는 시간을 줄여서 무언가를 이루기 보다는 깨어 있는 시간을 잘 활용하는 편이 더 합리적으로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잠에 관해서 얻은 교훈이 하나 있다면 다른 건 몰라도 잠과 설계 마감을 동시에 만족시킬 순 없다는 사실이다. 설계 마감이라는 것은 언제나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한 싸움이고 영원히 깨지지 않을 것 같은 기록이라서 어쩔 수 없이 잠을 억지로 줄일 수 밖에 없다. 대학 중간고사같은 경우는 워낙 평소에 공부를 게을리 해서, 원래 당일 치기로 보는 것이 효율적인 시험이라서, 혹은 그냥 동기들과 밤 새며 노는 재미에 잠 안 자고 지낸다 하지만 설계 마감같은 경우에는 일단 마감 조건을 만족시키려면 닥치고 밤 새는 수 밖에 없다. 나중에 이러한 습관이 계속되다 보면 설사 마감 전에 필요한 준비를 모두 마쳤다 해도 뭔가 불안하고 찝찝한 마음이 가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릇, 설계 마감이란 약속의 시간이 올 때까지 결코 멈춰서는 안 되는 시합인 것이다.
최근 하루 7~8시간 이상 자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평균 수명이 짧다는 해외 의학진의 연구 결과를 인터넷에서 본 적이 있는데 이 역시도 내가 죽기 전에는 자명한 사실이 되지 않는 까닭에 여전히 가설에 불과하다고 생각 중이다. 불의의 사고가 아닌데 남들보다 현격히 일찍 죽는다면 술, 담배를 멀리하는 나로서는 필히 취침 시간에서 그 원인을 찾아봐야 할 것이다. 변명이라고 생각 되겠지만 모든 삶에는 운명적인 요소가 일정 부분 차지한다고 믿고 있으며 사랑이 그러하듯 잠도 불가피한 비 선택적 영역이고 타고난 궁합인 것이다. 그리고 차라리 그렇게 믿는 것이 속 편하다. 하루 여섯 시간만 자도 상쾌한 인간들이 있는 반면 여덟 시간을 자도 온 몸이 철근같이 무거운 나같은 사람이 있는 법이다. 철저한 자기 관리와 노력을 통해 한 시간 정도는 땡겨볼 수 있겠으나 그 이상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무리가 아닐까 싶다. 앞서 얘기했듯, 차라리 깨어 있는 시간을 잘 활용하는 편이 더 현명한 방법이며 사실상 취침 시간이 중요한 작용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숙면을 취하는가, 즉 잠의 질에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여덟 시간을 자는 사람은 잠 들기 전에 30분 정도 뒤척이다가 잠이 들테고 자면서도 중간 중간 잘 깨기 마련이다. 혹은 자고 난 후에 완전히 망각되어야 할 꿈의 내용들이 너무 생생하게 입력이 되어 전혀 잔 것 같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런 사람이 무턱대고 잠을 줄이려다가는 오히려 불면증에 걸리거나 잠을 설쳐 만성 피로에 시달릴 가능성이 다분하다. 육체적인 활동과도 관계가 있지만 쉽게 컨트롤 할 수 없는 정신적인 측면과도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운명처럼 속 편히 받아 들이고 차라리 일찍 자라는 것이다.
이력서의 취미 항목에 '낮잠'을 적고 싶을 정도로 잠을 사랑하는 나로서도 나이가 들면서 예민해지고 그로 인해 수면 장애를 겪게 되는 상황을 어쩌지는 못하고 있다. 어려서는 아버지같이 무던하고 천진한 성격이었다면 점점 커가면서 얼굴도 성격도 어머니를 쏙 빼닮게 되었다. 평소에 걱정이 많으시고 예민한 성격 탓에 어머니는 작은 소리에도 쉽게 잠을 깨시고 좀처럼 다시 잠들지를 못 하신다. 심지어 수면 중에도 어찌나 심한 악몽을 꾸시는지 괴로운 잠꼬대를 연달아 읊어대셔서 걱정이 이만 저만 아니다. 이렇다 할 운동도 안 하는 대신 눈만 감으면 쿨쿨 세상 모르고 주무시는 아버지가 매일같이 운동을 하시는 어머니보다 현저히 건강하신 것도 다 잠을 달게 주무시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성격이 날카로운 사람들은 여간해서 숙면을 취하지 못해 외모마저 날이 서 있으며 장소를 불문하고 머리만 기대면 잠이 들고 옆집 공사하듯 코를 골아대는 사람들은 대개 살집이 좀 있고 둥글 둥글한 성격을 갖고 있다. 누군가는 나에게 edge가 살아있다고 묘사 하였는데 그런만큼 여전히 수면 장애는 진행형인 셈이고 어머니처럼 심한 잠꼬대를 하게 될까봐 조금 우려가 된다. 그러다보니 몇 시에 잠이 들었건 혹은 산술적으로 몇 시간을 잤건 눈을 뜨게 되는 순간이 결코 상쾌할 수 없음을 이해해야 한다. 아침은 언제나 하루 중 가장 날이 서 있는 순간이며 누구와도 말을 섞고 싶지 않은 심정이 역력히 드러난다. 등교든 출근이든 조용히 혼자 하는 것이 모두를 위한 길이고 제일 하기 싫은 말 중에 하나가 굿 모닝 혹은 좋은 아침이다. 외국에서야 워낙 아침 인사가 굿 모닝밖에 없었으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한국에서는 내가 먼저 좋은 아침이라고 인사를 건넨 법이 없다. not good 혹은 so so 정도가 아니라 아주 fxxk 하기 때문에 자기 감정에 충실한 것 뿐이다.
잠을 불규칙하게 잔다거나, 한꺼번에 몰아서 잔다거나, 혹은 몽유병이 있어 자면서 돌아다니는 경우가 아니라면 여덟 시간이든 열 시간이든 너무 시간 자체에 많은 의미를 두어선 안 될 것이다. 그냥 아 내가 잠이 좀 많은 것 같은데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습관을 길러볼까 하는 정도는 괜찮겠지만 내가 자는 동안 남들은 열심히 달리고 있을텐데 이렇게 세월을 낭비할 순 없어라며 죄책감에 사로잡혀 불안해 하고 있다면 건강하지 못한 자세이다. 잠을 잘 자는 것도 깨어 있는 시간을 잘 보내기 위한 일종의 준비 단계이며 하드 디스크 조각 모음을 하듯이 하루 중 있었던 많은 일들을 뇌에서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하는 것이니 아주 불필요하게 보내는 시간이 아니다. 게다가 가끔 꾸는 기상 천외한 꿈들은 여전히 나의 사고가 깨어 있음을 증명하며 때로는 현실보다 몇 배나 즐겁기도 해서 그것이 꿈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아마도 인류의 가장 창의적이고 로맨틱한 이야기들은 모두 누군가의 꿈 속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내가 앞으로 꼭 쓰고 싶은 영화 시나리오 중 하나도 너무 리얼하고 드라마틱한 꿈에서 모티브를 얻었으며 잠이 깼을 때 이것은 하늘이 준 큰 선물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감격이었다. 그 내용에 대해서는 일년 뒤 쯤 알 수 있을 것이고 다음 글에서는 오늘 낮에 겪은 우연한 꿈에 대해 쓸 것이니 잠과 꿈에 대한 나의 사랑은 여전히 유효하다. 잠을 자야 꿈을 꾼다는 속담처럼 꿈이 없는 자들은 일단 좀 잘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