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같이 피곤함에 쩔어 일찍 잠을 청했는데 허리가 쑤셔 중간에 일어난다면 중요한 거사를 망친 사람과 같은 낭패감을 맛보게 된다. 좀처럼 다시 잠을 청할 수 없는 신진대사 덕에 대개 4~5시가 될 때까지 뜬 눈으로 지샐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낮에 하던 일을 하게되면 뇌가 활성화되기 때문에 꼬박 밤을 새게 되는 역효과를 낳는다. 가끔 새벽에 생중계되는 uefa 챔피언스리그를 보는 행운을 잡을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멍하니 인터넷을 보며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거나 만화책을 보며 가급적 빨리 눈을 피로하게 만들려고 노력하게 된다.
작년에 한창 몸이 아팠을 때는 잠을 자는 것이 참으로 고역이었다. 어두운 방안에서 한참을 뜬 눈으로 누워 있다가 창문 밖으로 동이 서서히 트면 단잠을 방해하던 부정한 기운들이 슬슬 곁에서 떨어져나갔다. 그야말로 밤이 너무 길고 외로웠으며 이러다 한 순간에 확 돌아버리는 것이 아닐까 무섭기까지 하였다. 새벽 2~3시쯤에 바쁘게 걸어와 대문 앞에 신문을 던지는 배달원이나 가로등에 비치는 나뭇가지들의 거친 움직임이 괜시리 반가울 정도였으니까. 라디오를 켜게 된 것은 아주 우연한 일이었다. 남들보다 일찍이라고 할 수 있는 초등학교 때부터 라디오에 마음을 빼앗기긴 했지만 대학을 들어간 이후 밖에선 친구들과 술 먹고 집에선 오락하기 바빠서 라디오는 금새 나의 일상에서 멀어져 버렸다. 비쥬얼 시대에 발 맞추기 위해 그동안 라디오는 꽤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다시 라디오를 찾게 된 것은 그것의 가장 원초적인 기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꾸준히 잠을 청하면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소리를 듣는 것 뿐이고 더군다나 정신이 피폐해있던 순간에 디제이의 나즈막한 음성은 더없이 좋은 위로가 되었다.
여성 청취자들에게는 참으로 안 된 일이지만 심야 디제이가 주로 여성 아나운서들인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지금은 서장훈의 신부로 잘 알려진 오정연 아나운서를 비롯하여 손정은, 문지애, 최현정 아나운서들과는 시간이 갈수록 친분을 쌓아가는 듯한 묘한 느낌이 있었다. 같은 어둠을 보며 깨어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외로움은 크게 줄었기에 때론 녹음 방송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그 마음을 잘 아는 듯 디제이들은 실시간으로 문자 메세지를 받는 것 같은 인상을 주어 현장감을 살렸다. 새벽 방송일수록 원고를 읽기보다는 음악을 많이 틀지만 나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좋았기 때문에 가급적 사연 소개에 귀 기울이게 되었고 행여 노래를 틀기라도 하면 금방 토라져 다른 채널로 옮겨가기도 하였다. 따라서 간혹 게스트가 나와 방송을 할 때에는 반가움과 친근감은 배가 되었고 매주 그 요일은 기대로 가득찼었다. 문지애 아나운서와 스윗소로우 멤버가, 손정은 아나운서와 여자 리포터가 기대에 부응하여 좋은 콤비가 돼주었다. 고등학교 때에는 얼굴도 모르던 박나림 아나운서의 차분한 목소리가 그렇게 좋았는데 작년에는 문지애 아나운서가 그 역할을 대신해 뒤엉킨 실오라기들을 하나 하나 단정하게 풀어 주었다. 나보다 어린 사람이었지만 그때만큼은 누나나 엄마와 같은 기분이었다.
그런 밤 귀신같은 생활을 접고 라디오를 다시 멀리하게 된 것은 다른 건강상의 이유에서였다. 원체 저녁 식사 이후에는 음식 섭취를 안 했는데 뇌가 활동을 하다보니 위산은 계속 분비가 됐나보다. 위에서 야식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리며 오두방정을 떠는 사이 침만 꼴깍 꼴깍 삼키고 있었으니 예전에 치료했던 위궤양이 다시 재발한 것이다. 3시쯤만 되면 배가 쑤신 까닭에 라디오건 뭐건 다 제쳐두고 정상적인 생활 패턴으로 복귀해야 된다는 위기감이 엄습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그 하기 싫은 내시경을 또 해야 하니깐 말이다. 그 후로 물을 많이 마시고 참마를 씹어먹는 노력 끝에 위궤양은 잠잠해졌지만 심야 라디오를 열심히 듣던 습관은 계속해나갈 수 없게 되었다. 대신 요즘은 저녁에 운동장을 걷거나 집에 오는 길에 메이비의 볼륨을 높여요와 같은 하이틴 위주의 방송을 듣게 되는데 이건 또 이 시간대에 필요한 정서를 잘 보듬어주고 있어 나쁘지 않다. 라디오의 매력과 영향력을 너무 잘 알다보니 생애 한 번쯤은 라디오 디제이를 해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여행을 딱히 좋아하지도 않아 매일 출근 가능하며 어려서부터 방송에 관심이 많았으니 알고보면 훌륭한 디제이의 자격을 갖추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는 날이 온다면 새벽 두시에서 네시 사이를 노려보고 싶다. 목소리를 낮게 깔고 제대로 느끼하게 오프닝을 말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