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는 건축물을 설계할 뿐 완공된 건물을 소유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건물을 곁에 두고 관리하고 앞으로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건축주의 역할일 뿐, 건축가는 아이를 건강하게 낳는 데 까지만 책임이 있다. 때로는 부모가 법률적 지위를 과도하게 행사하여 생물학적 어머니의 권리를 전혀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생겨도 건축가는 이제 막 세상에 태어날 준비를 하는 다른 아이들 때문에 어떻게 손 쓸 겨를조차 없다.
매끈 매끈한 피부에는 광고판이 매달리고 투명한 창 안쪽에는 커다란 전화번호가 붙는다. 정숙하고 차분하게 자라기를 바랬던 건축가의 바램과는 달리 밤 마다 현란한 불빛으로 천 개의 얼굴을 드러내며 노골적이다. 앞으로 부모가 될 사람들은 한 술 더 떠서 아이를 만들기도 전에 자기 자식이 세상에서 제일 크고, 멋지고, 잘 생기고, 섹시하고, 똑똑하게 해 달라며 성화다. 누구 얘가 이번에 무슨 상을 받았다면서요? 누구 얘가 그렇게 돈 많이 번다면서요? 역시 유럽이나 미국쪽 엄마들이 그렇게 멋진 얘들을 잘 낳는다면서요? 이런 경우에는 특이하게 입양아라도 처음부터 원래 부모의 존재가 특히나 부각된다.
건축가는 매번 격렬한 진통에 시달리며 아이를 낳지만 그 아이는 원래부터 남의 아이이다.
하지만 누구보다 아이를 잘 알고 있고, 외도에 가슴 아파하며, 죽음에 눈물 짓는다.
이런 운명에도 불구하고 설계를 게을리하지 않는 것은 건물을 물건으로 여기지 않고 사랑으로 키우는 참된 건축주를 만날 수 있을거라는 희망 떄문이 아닐까. 아니면 언젠가 반드시 제 손으로 아이를 키우는 그 행복한 순간을 맛보기 위해서 일지도...
이 늦은 시각에도 아이와 씨름하고 있을 당신에게 축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