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푼 가슴을 안고 대학원 첫학기를 시작하던 학교 3층 스튜디오는 세계 각지에서 건축을 배우겠다고 모인 학생들로 인해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샴페인과 까나페만 없었다 뿐이지 그저 대상이 끌리는대로 다가가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이끌어내는 모습들은 드라마에서만 보던 일종의 파티와 같았다. 나는 그다지 사교적인 성격은 아닌지라 뭉게 뭉게 형성된 대화의 구름에 속하지 않고 간혹 누군가 스쳐가다 예의상 던지는 질문에 짧은 영어로 대답을 하던 소극적 인물이었다. 그렇게 인종전시장을 방불케하는 난잡함 속에서 초연히 전체를 관망하는 자가 되다보니 갈라파고스 제도에 던져진 다윈처럼 어느샌가 무리속에서 일정한 질서를 발견하게 되었다.
일단, 맨땅에 두발 딛고 열심히 썰을 풀어야 하는 자리이니 만큼 권력을 쥔 미국인들이 대화의 주제를 끊임없이 재편하는 주도적 위치에 있었고 이런 '팍스아메리카'의 지리적, 언어적 영향권 안에 있는 멕시코, 인도 등의 친구들이 현 국제 정세를 재현하듯 미국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물론 케이블티비 채널 바꾸듯 3개 국어를 버퍼링 없이 쏟아 내는 언어의 귀재, 유러피안들도 두터운 세력을 이루고 있었고, 이날을 위해 수십년 갈고 닦아 온 듯한 완벽한 영어(게다가 미국인의 1.5배속으로)를 뽐내는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슬로베니아에서 온 친구와 뉴스에서 몇 번은 들어 봄직한 세르비아 친구도 눈에 띄었다. 서양의 수준을 월등히 넘어서는 전투적 교육을 받아 온 아시안들은 괜히 어눌한 영어 솜씨를 공개했다가 한순간 부끄러운 존재가 될까 우려해 자기 나라 사람들끼리만 똘똘 뭉쳐있었고 그러다 우연히 다른 아시아 친구의 구수한 발음을 듣기라도 하면 그제야 얼굴에 피어나는 행복감은 '너와 나는 말이 좀 통하겠구나'하는 반가움을 넘어 안도감으로 까지 해석될 정도였다.
이렇게 언어와 인종으로 확연히 구별되는 심리적 거리는 지리적 거리와 다름 아니라고 결론내리는 순간 스튜디오 멀지 않은 곳에서 벽을 등지고 앉아 분위기에 아랑곳 않고 자기들 할 일만 묵묵히 하는 거룩한 집단이 눈에 들어왔다. 얼마 뒤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들은 L.A에 위치한 싸이악(sci_arc:남가주 건축 대학) 학생들로 이미 2학년 이었고 로테르담을 배경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어 우리 학교에 베이스 캠프를 꾸린 것 이었다. 양측 모두 종합 대학이 아닌 건축 전문 학교라 그런지 그동안 남다른 교류가 있어왔고 가난한 우리 학교측에서는 넉넉한 공간을 대여해 재정 보충을 꾀할 수 있었으니 서로에게 좋은 기회였을 것이다. 싸이악 학생들은 이미 1학년을 거친 까닭에 서로에 대한 새로움도 없었고 프로젝트가 끝나는 6개월 후에는 L.A로 돌아갈 운명이었으므로 새로운 인간 관계를 맺는데에 적극성이 결여될 수 밖에 없었다. 상황 파악이 우리보다 빨랐던 그네들은 하루라도 빨리 프로젝트를 진행하는게 신상에 이롭다고 생각하였고 그래서 그렇게 노트북 모니터만을 주시하고 있었겠거니 하면 약간은 비호감이 될 수도 있었던 그들의 자세는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한 학생이 있었다.
몇 명씩 모여서 집을 렌트했음이 분명한데도 누군가의 집 빈 구석에서 몰래 구겨져 자고 오는 듯한 행색을 하는 또래들과는 달리 그녀는 품격 있는 회사에 출근하는 사람처럼 언제나 정갈한 자태로 등장하였다. 캘리포니아의 기후 특성상 앞으로 언제 또 입을지 모르는 외투였음에도 HEMA와 같은 네덜란드 저가 매장에서 어쩔 수 없이 대충 구입한 느낌이 아니었고 유럽의 변화 무쌍한 날씨에도 한 점 흐트러짐 없는 몸가짐을 갖추기 위해 제대로 준비한 듯한 아이템들 이었다. 매일 같이 가지런하게 빗어 넘긴 머리위로는 옅은 갈색의 광채가 흐르고 그 아래 명확하게 규정된 이마의 볼록함은 두상 어디 한군데 들쑥 날쑥한 곳이 없을 것이라 생각 될만큼 탐스러웠다. 워낙에 앉아서 내리 작업만하고 과묵했던지라 도톰한 입술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지만 아주 가끔 미소지을 때 살며시 드러나는 치아들은 이제 막 잇몸을 뚫고 나왔다고 해도 믿을만큼 건강해보이고 가지런하였다. 이렇게 어디를 훑어봐도 완벽한 조화를 자랑하는 외모에서 가장 압권은 데칼코마니로 얼굴을 빚어낸게 아닌가 착각을 불러 일으키는 코였다. 그녀의 코는 단순히 호흡기로써 존재하는게 아니라 예리하게 솟은 콧날로 상대방의 숨을 일순간 멈추게하는 효과가 있었고, 야무지게 다문 입술과 함께 할 때에는 그 누구도 쉽게 접근하지 못할 냉기를 뿜어내는 기능을 갖추었다. 이렇듯 전체적인 인상을 결정하는 치명적이고 날카로운 콧날을 경외하듯 나는 그녀에게 '칼코'라는 이름을 붙여줬고 덕분에 한국사람들 끼리는 그녀가 바로 옆에 있다 하더라도 개의치 않고 자유롭게 칭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였다.
미모와 콧날이 워낙 압도적인지라 동양인 친구들은 감히 말을 걸어 볼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물론 전혀 별개의 수업을 듣기 때문에 얼굴을 맞댈 기회도 없었거니와 행여 파티에서 본다 하더라도 살벌한 영어와 공감 안 되는 주제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그림자 놀이를 하기엔 얻을 수 있는 결과가 그다지 희망적이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주변의 누구도 그녀의 마음 석자 알지 못했고 그렇게 신비감은 커져만 갔다.
학기가 종반으로 치닫고 있을때쯤 우리들은 싸이악의 학생들과 함께 다른 학교에서 진행되는 워크샵에 참가하게 되었고 워낙 단기간에 결과물을 만들어내는게 목적인지라 매일같이 게릴라같은 스터디가 여기 저기서 정신 없이 이루어졌다. 밥은 누구랑 어디서 뭘 먹어야 할지 오늘은 또 몇시쯤 집에 갈 수 있을지 암담했던 생활들이 차차 익숙해지는 때가 되자 어느새 컴퓨터에는 마지막 발표를 위한 판넬작업이 올라와 있었다. 칼코가 노트북에 꽂을 콘센트를 찾아 헤매다 내 바로 옆 테이블에 앉은 것도 딱 그 순간 이었다. 이보다 더 가깝게 거리를 유지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내심 의식하고는 있었지만 모든 감정이 배제된 '이퀄리브리엄'의 세계에서 온 듯한 그녀의 작업 태도에 그 이상의 기대는 정말 무의미한 것이었다. 배터리가 완충되는 순간 미련없이 떠날 수 있는게 노트북이고 그것이 워크샵의 밑바탕이니까 말이다. 흠잡을데 없는 형태미와 성능을 자랑하는 '애플'의 '맥북프로'는 그런 그녀에게 너무도 잘 어울리는 작업환경이었고 왠지 '아수스'나 '델'은 L.A에서 온 처자와는 어울리지 않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그녀가 갑자기 작업을 멈추고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마도 고해상도의 이미지를 많이 다루는 마지막 작업을 하다보니 노트북에 과부하가 걸렸던 것 같다. 마감때는 흔히 일어나는 일이지만 그녀는 감히 '맥북프로'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이라고는 받아들이지 못하는 듯 하였다.
(후편에서 계속)
칼코_1
2008. 9. 10. 21: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