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일만 하기 때문에 바깥 세상의 변화를 뒤늦게 알아챈 것일까. h양의 블라우스는 희대의 듀오들 처럼 다이나믹하게 찾아오는 기온 저하와 강한 바람에 속수무책으로 보였다. 반대로 목까지 올라오는 점퍼에 모자와 마스크까지 겸비한 나는 그것도 모자랄까봐 안에 후드 점퍼까지 껴 입고 있었기에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군대 깔깔이처럼 누벼 생각보다 따뜻한 외투를 벗어주고 싶었지만 남자 친구도 아닌게 괜히 오버하는 것 같기도 했고 신경써서 세팅한 그녀의 패션에 누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적당히 아무 까페나 들어가도 됐을텐데 h양은 예의 그렇듯 고집스럽게 마음 속에 점 찍어 놓은 그 곳을 찾아 좌회전, 우회전을 반복하며 압구정 골목들을 헤집고 다녔고 그러면서도 내 기분을 상하게 하지는 않을까 걱정스런 눈빛이었다. 내가 14년 전 그 동네에서 재수할 때만 해도 웬만한 골목과 상점들을 꿰 차고 있었는데 너무도 오랜만에 찾은 로데오 밤 거리는 낯설음과 신기함 그 자체였다. 어느덧 도산공원의 영역에 들어서자 h양은 이제야 알 것 같다며 발걸음을 재촉했고 대체 얼마나 좋은 카페이길래 이 추위를 무릅쓰고 나를 데려가고 싶어하는 것일까 기대감은 커져만 갔다.
"바로 여기야."
눈 앞에 보이는 꽃 집을 보고 설마 여긴가 싶은 찰나. 그녀는 바로 코너를 돌아 근린생활시설 입구 문을 열고 2층으로 향하였다. 나는 일상적이지 않은 카페의 위치에 의아했고 빠른 걸음으로 쫓아 갔던지라 목적지를 알리는 어떠한 사인도 발견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바로 그런 점이 모르는 곳을 처음 방문할 때의 흥미로움 일 수 있기에 한 걸음 한 걸음이 모험가의 심정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는 계단을 오르다가 카페가 문을 닫았을 수도 있다는 말을 꺼내니 궁금증은 한껏 증폭되었다. '아니 세상에 무슨 카페가 여덟시도 되지 않아 문을 닫냐고.'
그래도 다행이 추위를 무릅쓰고 온 정성이 통했는지 벽이 통째로 열리듯 자동문이 작동하였고 드디어 기쁜 마음으로 실내에 들어설 수 있었다. 역시 예상한대로 보통의 카페와는 확연히 달랐다. 인테리어 소품들과 악세사리들이 판매용으로 여기저기 세팅되었고 중앙에는 made in italy라고 적힌 아주 오래된 테이블이 제각각으로 생긴 의자들과 함께 놓여 있었다. 그 옆으로 3~4인용 자리가 마련되었는데 바닥에 낮게 깔려 공간을 더 널찍이 느낄 수 있게 하였다. 오리지널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앉은 의자도 어느 유명한 디자이너의 작품이었고 카페 전체적으로 앤틱한 냄새를 풍기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h양은 벽에 걸린 거울을 탐내기도 하다가 뒷편의 서랍장을 흥미롭다는 듯이 뒤적였다.
"아 죄송한데 그거는 저희 개인 사물함이에요."
직원이 완곡하게 제지하며 눈으로만 감상할 것을 권했다.
"아마 니가 이 서랍을 열어본 천 번째의 사람일거야."
그만큼 뭔가 비밀스럽고 신기한 보물들로 가득차 있을 것 같이 낡고 탐스러운 판도라의 상자들이었다.
알고보니 이 곳은 예술 혹은 작가 활동을 하는 몇 몇 지인이 모여서 만든 그들만의 작업실 겸 카페였다. 그제서야 공간의 성격과 카페의 이름이 명쾌하게 이해되었다. 오히려 카페의 기능이 제일 하위에 속하는 것 처럼 보였다. 그만큼 부엌의 영역은 작았고 손님도 우리 밖에 없었다. 친구는 스콘과 핫초코를 시켰고 카페인 섭취를 자제하는 나도 커피 보다는 핫초코가 좋았다. 그러다 갑자기 계산 전에 변덕이 생겨 잉글리쉬 브렉퍼스트 티에 우유를 추가해 밀크티를 자가 제조해 먹으려고 했으나 주인은 그러면 맛이 너무 밋밋하다며 이 곳의 핫초코는 진짜 초콜렛을 녹여 만들기 때문에 아주 진하고 맛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순간 스페인에서 경험했던 석유 원액처럼 진득허니 독한 리얼 핫초코가 떠올랐지만 이러쿵 저러쿵 따지고 싶지 않아서 역시나 핫초코를 선택하였다. 우려했던 바와는 달리 목 넘김도 어렵지 않고 초코렛 향도 진한 핫초코가 나와 매운 오징어 볶음을 저녁으로 먹은 우리의 얼얼한 입을 달래주었다.
그리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뜬금없이 유레카를 외치고 말았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내가 더 넓은 공간을 바라볼 수 있게 자리 잡은 것이 첫 번째 이유겠고, 대화 주제를 다양하게 가져보려고 머리를 열심히 굴린 것이 두 번째 이유쯤 되겠다. 나는 졸다가 흠칫 놀란 사람마냥 눈을 크게 뜨며 주위를 다시 한 번 둘러 봤고 이제는 확신이 선다는 듯 당당하게 얘기했다.
"나 여기 알아."
"응?"
"나 여기서 사진전 했었어."
"너 혼자서?"
"아니. 내가 속한 사진 클럽에서 했어가지고 나도 참여한거지. 근데 나는 그 때 네덜란드에 있어서 사진만 보내준 거라 실제로 와 본 건 오늘이 처음이야."
"그랬구나. 다음에 또 하면 나 꼭 초대해줘."
"아 물론이지. 그때 우리 부모님도 오셨었는데..."
그랬었다.
2006년. 내가 속한 하이엔드딴따라사진클럽에서 전시 장소로 택한 곳이 이 곳이었다. 나는 네덜란드에서 막 졸업을 한 상태였고 그래서 직접 참여는 못 하고 사진만 필름스캔해서 파일로 보내 주었었다. 직접 작업을 함께 하지 못했기 때문인지 실상 나의 사진들은 보내준 것에 비해 몇 작품 걸리지 않아 아쉬웠었다. 더욱이 다 함께 모여 전시장을 채워나가는 과정을 누군가의 사진으로만 봐야 했을 때 그 자리에 내가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웠었다. 그래서 사진전을 한 셈이지만 거기에 대한 실제적인 경험, 기억, 감상 따위는 남아있질 않다. 판매가 되지 않은 사진 몇 장이 되돌아 왔을 뿐이다. 그런데 그 뒤로 2년 후 내가 그 곳에 앉아서 기억상실증 환자처럼 신기하게 주변을 둘러보고 아무렇지도 않게 차를 마시고 있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지만 운명처럼 나를 이끌고 억지로 이 곳을 찾아 준 친구에게는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였다. 이로써 막연하게 허공을 떠돌던 나의 기억은 어느정도 제자리를 찾아 물질 속에 녹아들 수 있었다.
지금 그 때를 생각해 보면 우리 클럽이 가장 왕성한 활동을 했던 전성기였고 전시를 기점으로 멤버들은 조금씩 각자의 삶에 더 집중하게 되었다. 그 와중에도 변함없이 사진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열심히 사진 관련 자료들을 뒤적이는 사람들이 있지만 무슨 카메라가 나온다더라, 이 렌즈는 어떻다, 이번엔 이 걸 샀다는 둥의 장비에 관계된 사항들이었고 정작 사진은 각자의 컴퓨터 폴더나 개인 블로그에 더 많이 들어가 있었다. 나 같은 경우도 2007년에 귀국한 후 한동안 한국에서는 대체 뭘 찍어야 하나 많이 망설여 하고 고민도 해 봤으며 그나마 요즘에 찍은 사진들도 보도용 사진이나 건축/인테리어 사진이 대부분이라 정작 전시를 위해서 내 보일만한 결과물이 마땅치 않다. 매 년 전시에 대한 얘기가 한 번쯤은 누군가의 입을 통해 언급되긴 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 누가 선뜻 나서서 열심히 끌어 당기지 않는 이상 딴따라클럽의 2회 전시는 언제라고 기약할 수 없는 일이다. 그까짓 옛 추억하나 상기시켰다고 혼자 감격해서 '우리는 꼭 다음 전시를 성사시켜야 합니다'라며 회원들의 멱살을 잡아 당길 수 없는 노릇이고 당장 내일의 밥 벌이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수익도 없는 전시를 강행할 당위성도 찾을 수 없다. 오늘은 그냥 옛날 사진이나 꺼내 보면서 흥분을 가라앉혀야겠다.
포스터 디자인: ageha
그 밖의 사진 출처: 딴따라클럽
그리고...
지인이 고맙게도 자세히 리뷰해 준 덕분에 더욱 현장감을 잘 느낄 수 있었던 사진들.
→ 전시장 풍경_1
→ 전시장 풍경_2
"바로 여기야."
눈 앞에 보이는 꽃 집을 보고 설마 여긴가 싶은 찰나. 그녀는 바로 코너를 돌아 근린생활시설 입구 문을 열고 2층으로 향하였다. 나는 일상적이지 않은 카페의 위치에 의아했고 빠른 걸음으로 쫓아 갔던지라 목적지를 알리는 어떠한 사인도 발견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바로 그런 점이 모르는 곳을 처음 방문할 때의 흥미로움 일 수 있기에 한 걸음 한 걸음이 모험가의 심정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는 계단을 오르다가 카페가 문을 닫았을 수도 있다는 말을 꺼내니 궁금증은 한껏 증폭되었다. '아니 세상에 무슨 카페가 여덟시도 되지 않아 문을 닫냐고.'
그래도 다행이 추위를 무릅쓰고 온 정성이 통했는지 벽이 통째로 열리듯 자동문이 작동하였고 드디어 기쁜 마음으로 실내에 들어설 수 있었다. 역시 예상한대로 보통의 카페와는 확연히 달랐다. 인테리어 소품들과 악세사리들이 판매용으로 여기저기 세팅되었고 중앙에는 made in italy라고 적힌 아주 오래된 테이블이 제각각으로 생긴 의자들과 함께 놓여 있었다. 그 옆으로 3~4인용 자리가 마련되었는데 바닥에 낮게 깔려 공간을 더 널찍이 느낄 수 있게 하였다. 오리지널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앉은 의자도 어느 유명한 디자이너의 작품이었고 카페 전체적으로 앤틱한 냄새를 풍기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h양은 벽에 걸린 거울을 탐내기도 하다가 뒷편의 서랍장을 흥미롭다는 듯이 뒤적였다.
"아 죄송한데 그거는 저희 개인 사물함이에요."
직원이 완곡하게 제지하며 눈으로만 감상할 것을 권했다.
"아마 니가 이 서랍을 열어본 천 번째의 사람일거야."
그만큼 뭔가 비밀스럽고 신기한 보물들로 가득차 있을 것 같이 낡고 탐스러운 판도라의 상자들이었다.
알고보니 이 곳은 예술 혹은 작가 활동을 하는 몇 몇 지인이 모여서 만든 그들만의 작업실 겸 카페였다. 그제서야 공간의 성격과 카페의 이름이 명쾌하게 이해되었다. 오히려 카페의 기능이 제일 하위에 속하는 것 처럼 보였다. 그만큼 부엌의 영역은 작았고 손님도 우리 밖에 없었다. 친구는 스콘과 핫초코를 시켰고 카페인 섭취를 자제하는 나도 커피 보다는 핫초코가 좋았다. 그러다 갑자기 계산 전에 변덕이 생겨 잉글리쉬 브렉퍼스트 티에 우유를 추가해 밀크티를 자가 제조해 먹으려고 했으나 주인은 그러면 맛이 너무 밋밋하다며 이 곳의 핫초코는 진짜 초콜렛을 녹여 만들기 때문에 아주 진하고 맛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순간 스페인에서 경험했던 석유 원액처럼 진득허니 독한 리얼 핫초코가 떠올랐지만 이러쿵 저러쿵 따지고 싶지 않아서 역시나 핫초코를 선택하였다. 우려했던 바와는 달리 목 넘김도 어렵지 않고 초코렛 향도 진한 핫초코가 나와 매운 오징어 볶음을 저녁으로 먹은 우리의 얼얼한 입을 달래주었다.
그리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뜬금없이 유레카를 외치고 말았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내가 더 넓은 공간을 바라볼 수 있게 자리 잡은 것이 첫 번째 이유겠고, 대화 주제를 다양하게 가져보려고 머리를 열심히 굴린 것이 두 번째 이유쯤 되겠다. 나는 졸다가 흠칫 놀란 사람마냥 눈을 크게 뜨며 주위를 다시 한 번 둘러 봤고 이제는 확신이 선다는 듯 당당하게 얘기했다.
"나 여기 알아."
"응?"
"나 여기서 사진전 했었어."
"너 혼자서?"
"아니. 내가 속한 사진 클럽에서 했어가지고 나도 참여한거지. 근데 나는 그 때 네덜란드에 있어서 사진만 보내준 거라 실제로 와 본 건 오늘이 처음이야."
"그랬구나. 다음에 또 하면 나 꼭 초대해줘."
"아 물론이지. 그때 우리 부모님도 오셨었는데..."
그랬었다.
2006년. 내가 속한 하이엔드딴따라사진클럽에서 전시 장소로 택한 곳이 이 곳이었다. 나는 네덜란드에서 막 졸업을 한 상태였고 그래서 직접 참여는 못 하고 사진만 필름스캔해서 파일로 보내 주었었다. 직접 작업을 함께 하지 못했기 때문인지 실상 나의 사진들은 보내준 것에 비해 몇 작품 걸리지 않아 아쉬웠었다. 더욱이 다 함께 모여 전시장을 채워나가는 과정을 누군가의 사진으로만 봐야 했을 때 그 자리에 내가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웠었다. 그래서 사진전을 한 셈이지만 거기에 대한 실제적인 경험, 기억, 감상 따위는 남아있질 않다. 판매가 되지 않은 사진 몇 장이 되돌아 왔을 뿐이다. 그런데 그 뒤로 2년 후 내가 그 곳에 앉아서 기억상실증 환자처럼 신기하게 주변을 둘러보고 아무렇지도 않게 차를 마시고 있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지만 운명처럼 나를 이끌고 억지로 이 곳을 찾아 준 친구에게는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였다. 이로써 막연하게 허공을 떠돌던 나의 기억은 어느정도 제자리를 찾아 물질 속에 녹아들 수 있었다.
지금 그 때를 생각해 보면 우리 클럽이 가장 왕성한 활동을 했던 전성기였고 전시를 기점으로 멤버들은 조금씩 각자의 삶에 더 집중하게 되었다. 그 와중에도 변함없이 사진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열심히 사진 관련 자료들을 뒤적이는 사람들이 있지만 무슨 카메라가 나온다더라, 이 렌즈는 어떻다, 이번엔 이 걸 샀다는 둥의 장비에 관계된 사항들이었고 정작 사진은 각자의 컴퓨터 폴더나 개인 블로그에 더 많이 들어가 있었다. 나 같은 경우도 2007년에 귀국한 후 한동안 한국에서는 대체 뭘 찍어야 하나 많이 망설여 하고 고민도 해 봤으며 그나마 요즘에 찍은 사진들도 보도용 사진이나 건축/인테리어 사진이 대부분이라 정작 전시를 위해서 내 보일만한 결과물이 마땅치 않다. 매 년 전시에 대한 얘기가 한 번쯤은 누군가의 입을 통해 언급되긴 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 누가 선뜻 나서서 열심히 끌어 당기지 않는 이상 딴따라클럽의 2회 전시는 언제라고 기약할 수 없는 일이다. 그까짓 옛 추억하나 상기시켰다고 혼자 감격해서 '우리는 꼭 다음 전시를 성사시켜야 합니다'라며 회원들의 멱살을 잡아 당길 수 없는 노릇이고 당장 내일의 밥 벌이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수익도 없는 전시를 강행할 당위성도 찾을 수 없다. 오늘은 그냥 옛날 사진이나 꺼내 보면서 흥분을 가라앉혀야겠다.
그 밖의 사진 출처: 딴따라클럽
그리고...
지인이 고맙게도 자세히 리뷰해 준 덕분에 더욱 현장감을 잘 느낄 수 있었던 사진들.
→ 전시장 풍경_1
→ 전시장 풍경_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