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s: cinema & spirits 45

거리에서

손으로 웃음을 훔치며 지나가는 사람은 호기심을 자극한다. 누군가와 핸즈프리로 전화중이었건, 이유없이 미친거였든 표정이 살아있는 사람을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뜻하지 않게 눈을 마주치는 사람은 반가운 인연이다. 바쁜 자기 길만 좇거나 선글라스로 감정을 숨기기 보다는 순간이라도 눈을 맞추려는 마음에서 여유를 느낀다. 소리없이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고결하다. 아무렇지 않게 침을 내뱉거나 담뱃재를 터는 사람보다 흐느낌마저 주워 담으려는 자세가 아름답다.

연어

단 한번의 만남도 운명입니다. 그대와 내가 마주치는 순간 그대에게는 나라는 나에게는 그대라는 새로운 인연이 맺어집니다. 낮과 밤의 단순한 반복은 최면을 거는 듯 빠르게 점멸하고 세상의 모진 곳을 홀로 헤매이다 때로는 배를 내밀고 한 숨을 토해도 눈을 감지 못하는 운명입니다. 내가 살아 온 이야기들 지난 삶의 보석 알알이 투명한 그대 마음을 오렌지 빛으로 물들입니다. 힘겹게 쏟아낸 생명들이 하나씩 터지면서 재잘대는 소리가 또 다른 인연을 약속하며 퍼져갑니다. 나는 그대의 연어 입니다. 처음 만났던 그 자리에서 끝이 없는 사연을 낳기위해 세월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한 마리 힘찬 연어가 되겠습니다.

공감각

그거 보았니? 들어 보았니? 먹어 보았니? 알아 보았니? 물어 보았니? 눈으로 '본다'라는 행위의 저변에는 의식하지 않아도 항상 귀가 열려 소리를 듣고 있고 숨을 쉬며 피가 돌고 있고 누군가에게 말해주고 싶은 얘기들이 입 안 가득 맴도는거야. 너에게 '미안해'라고 보낸 쪽지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떨쳐낼 수 없는 나약한 심정과 애써 괜찮은 척 보내는 일상들과 여전히 좋아한다고 말할 수 없는 슬픔이 빈 칸 가득 담겨있는거야.

찍사의 운명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자신이 소유한 모든 카메라를 처분하고 장엄한 소멸의 순간들을 담기에 제격이라 생각되는 각자가 그리던 꿈의 카메라를 손에 넣기 위해 하루를 분주히 보낼 것이다. 흑백과 칼라 어떤 것으로 찍으면 좋을지 단 두가지 선택만으로 마지막 밤을 설치고 결국 작은 뷰파인더 창를 통해 세계의 종말을 맞이하게 될 사진을 취미로 하는 사람들이란 그런 운명인 것 같다. 광년의 시간이 흐른 뒤 다른 행성에 도달하게 될 지구의 흔적들은 죽은 산호가 퇴적되어 곱게 깔린 바다처럼 푸른 옥색을 띄기를 소망할 것이다. 나는 Leica M8.2에 50mm Noctilux를 물려서 가장 아름다운 빛망울과 함께 산산히 부서지고 싶다.

커튼을 걷지 않는 것은

한 입 크게 베어문 흔적만 남은 채 버려진 과일처럼 텁텁하고 말라버린 육신을 보이는게 부끄럽기 때문입니다. 바람이 부는대로 그저 휘청거리고 마는 앙상한 가지들처럼 한 순간도 담지 못하고 흘려 보낸 뒤 밀려오는 공허함을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행여나 들키지 않을까 남몰래 사랑을 나누는 연인들처럼 두근거렸던 그 날의 기억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따뜻한 봄기운이 미약하게 남은 그대의 온기를 삼켜버릴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초라한 모습 뒤로 길게 드리워지는 그림자를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칼코_2

그때였다. 그녀는 갑자기 노트북 화면을 접더니 가슴에 꼭 끌어안고 속삭이기 시작했다. "아가 괜찮아. 다 괜찮아질거야." 눈을 살며시 감고 한 손으론 컴퓨터를 들고 나머지 손으로는 컴퓨터의 사과마크를 문지르면서 타일르듯 말하였다. 사물을 대놓고 의인화시키는 낯부끄러운 행동임에도 컴퓨터가 안심하듯 가릉거리며 시스템을 정지시킬 때 까지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지 않았다. 아마도 타인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듯 했다. 괜히 어설프게 "is he ok?"하고 물었다가는 그녀와 컴퓨터 사이의 성스러운 교감을 방해한 대가로 원망의 눈초리를 받을 것만 같았다. 주변 사람들과 다같이 하하하 유쾌하게 웃어 넘기고만 싶은데 위험한 범죄현장 속의 목격자처럼 입 속에는 찝찝함이 머물렀다. 주술로 힘을 얻은 컴퓨터가 그 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