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s: cinema & spirits 45

스물 일곱을 넘긴 자의 여유

천재는 스물 일곱에 요절을 한다고 스물 네살쯤에 어디선가 읽었던 것 같다. 당장 검색해도 지미 핸드릭스, 커트 코베인, 이상, 바스키아 정도 밖에 찾을 수 없고 우리가 잘 모르는 천재들을 총 출동시켜 수명 그래프를 그려봐도 스물 일곱에서 정점을 이룰리는 없을텐데 왜 하필 스물 일곱일까. 아마도 서른 살 미만의 범위에서는 압도적인 분포를 보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천재의 운명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마약과 술, 여자(혹은 남자)로 스스로를 학대하다가 한계를 이기지 못하고 운명하는 것이 대게 스물 일곱이던가... 강직성 척추염으로 인해 마감때마다 찾아오는 격심한 허리 통증이나 가끔 예기치 않게 발생하는 불규칙한 심장 박동 때문에 남들보다 오래 살지 못할 거라는 불안감은 해가 갈수록 조금씩 커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칼코_1

부푼 가슴을 안고 대학원 첫학기를 시작하던 학교 3층 스튜디오는 세계 각지에서 건축을 배우겠다고 모인 학생들로 인해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샴페인과 까나페만 없었다 뿐이지 그저 대상이 끌리는대로 다가가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이끌어내는 모습들은 드라마에서만 보던 일종의 파티와 같았다. 나는 그다지 사교적인 성격은 아닌지라 뭉게 뭉게 형성된 대화의 구름에 속하지 않고 간혹 누군가 스쳐가다 예의상 던지는 질문에 짧은 영어로 대답을 하던 소극적 인물이었다. 그렇게 인종전시장을 방불케하는 난잡함 속에서 초연히 전체를 관망하는 자가 되다보니 갈라파고스 제도에 던져진 다윈처럼 어느샌가 무리속에서 일정한 질서를 발견하게 되었다. 일단, 맨땅에 두발 딛고 열심히 썰을 풀어야 하는 자리이니 만큼 권력을 쥔 미국인들이 대화의..

탈모의 추억

번듯한 직장 생활로 다달이 주택청약부금을 채우거나 사랑하는 사람과 시제의 삼단계(과거, 현재, 미래)를 알콩 달콩 논하는 형편이 아님에서 오는 정신적 아노미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거북한 현실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수확의 계절과는 먼 아파트 장판 바닥에 거뭇거뭇 풍년을 이룬 머리카락들을 보고 있자면 매일같이 생산해내는 스트레스의 양이 얼마만큼인지 산술적 설명이 가능할 정도이다. 뿌리를 끊고 자살한 머리카락들이 내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는 서글픈 생각과 함께 주섬 주섬 손날로 머리카락들을 한 데 모으다가 문득 머리가 예상 외로 많이 빠져 지금과 같이 결실 없는 수확을 해야 했던 중학생 시절을 떠올리게 되었다. 이런 생산량이면 삼십대엔 가발 공장을 차려도 되겠다며 문제의 심각성을 나름 긍정적으로 회피했던 그..

라디오가 주고 간 불면증

인터넷에서 배송비 포함 7000원에 구입 한 라디오는 한 달도 되지 않아 자신의 역할을 포기한 듯 불규칙한 숫자들을 정보 창으로 쏟아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어폰을 타고 들려오는 유희열의 목소리에서 89.1이 우연찮게 잡혔으니 오늘 밤은 이런대로 지내도 괜찮겠다 넘어간다. made in china가 만들어내는 노이즈는 마침 비를 주제로 전개되는 노래와 섞여 예기치 않은 감성으로 다가오며, 억지로 기억 저편으로 밀어 넣었던 얘기들은 곧 잠이 들리라던 기대를 깨고 아무리 숨겨도 결국 드러나는 장롱 속 비디오처럼 빠알간 속살을 노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