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2: 우와~ 영화에서 말고 실제로 이렇게 높은 대나무들을 보긴 처음이에요. 

어른: 쭉쭉 뻗은 나무들이 만들어주는 그늘 덕분에 아주 시원하지 않니? 동양의 정서를 대표하는 풍경이기 때문에 네 말대로 대나무들은 영화에 자주 등장하곤 하지. 그런데 이 숲길은 대나무가 빼곡해 특별하기도 하지만 여기서부터가 소쇄원의 영역을 알리는 역할을 한단다. 

아이1: 하지만 아직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걸요?

어른: 응. 그렇지. 우리가 사는 바깥 세계에서의 복잡함을 잊고 깨끗한 마음으로 소쇄원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긴 숲길을 걸어야 하는 준비과정이 필요하단다. 이 대나무들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자연의 세계로 서서히 우리를 안내하는 다리인 셈이지. 


(갑자기 고양이가 먼저 달려 나간다.)

아이1: 앗! 시자! 혼자 가면 안 돼. 이런 빠르기도 하지. 

아이2: 벌써 사라져 버렸어요.

어른: 괜찮아. 먼저 가서 쉬고 있겠지. 우리도 이제 거의 다 왔단다. 

아이1: 정말요? 하지만 입구를 지나오지도 않았는데요?

어른: 응. 그게 소쇄원의 가장 큰 묘미 중의 하나란다. 저기 끊어진 담장이 보이지? 저 담장의 좌측으로 가면 소쇄원의 내부로 들어가는 거고 우측으로 가면 산길을 주욱 오르는 거야. 

아이2: 큰 기대를 하고 온 사람들은 실망하겠는걸요?

어른: 여기서 부터가 소쇄원이요라고 엄격하게 정해놓은 것 보다 이렇게 대나무 숲길을 건너다가 자연스럽게 진입하는 방식에서 우리 선조들이 자연을 대하는 태도와 이를 건축에 반영하는데 있어 뛰어난 감각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우리 조상들은 과장되거나 꾸미는 것을 사양하고 자연과 자연스럽게 하나가 되길 바랬거든.

아이1: 자연과 자연스럽게라구요? 흠. 알듯 말듯 하네요.


(대봉대에 한가로이 누워있는 시자를 발견한다.)

아이2: 앗. 저기 시자가 누워있다.  

아이1: 얌체같이 혼자만 편하게 드러누워 있다니.

어른: 이거 시자가 제대로 쉴 곳을 찾았구나. 여기는 대봉대(待鳳臺)라고 하는 작은 정자인데 주로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만든 장소야. 이름을 풀이하자면 전설의 동물인 봉황새를 기다린다는 의미인데 예로부터 봉황은 좋은 소식을 가져온다고 믿었거든. 봉황이 둥지를 틀고 산다는 벽오동나무와 열매를 먹는다는 대나무를 주변에 심었으니 손님을 봉황같이 여기고 귀하게 맞이하려는 세심한 배려가 느껴지지 않니?

아이1: 하지만 지금은 시자가 누워있으니 고양이 묘(猫)를 따서 대묘대라고 불러야겠네요.

어른: 하하. 그렇구나. 게다가 소쇄원 중앙을 가로질러 흐르는 계곡물을 끌어다 만든 연못에는 손님과 나누어 먹기 위해 물고기를 풀어 놓았다하니 시자가 이 장소를 탐내는 게 어쩌면 당연하게 생각되는구나.

아이2: 여기 쓰여 있는 한자는 어떻게 읽는 거죠?

어른: 응. 그건 애양단(愛陽壇)이라고 읽는 거란다. 이 ㄱ자로 꺾인 담장으로 둘러싸인 공간을 말하는 건데 햇살이 머물러 사시사철 따뜻하라는 마음과 함께 부모에 대한 지극한 효심이 녹아 있는 곳이지.   

아이2: 누구의 부모인데요?

어른: 저런. 그러고 보니 정작 소쇄원을 만든 사람에 대한 얘기를 빼먹었구나. 소박하고 포근한 풍경에 취해 나도 모르게 내 역할을 까먹었었네. 그러기 전에 우리 다리를 건너서 저기 보이는 별당에서 얘기를 이어가보는 게 어때? 저기가 바로 이 정원의 사랑채로서 글도 읽고 시도 읊으며 학문을 하던 곳이거든. 


(이동 중 담벼락 아래에 난 구멍으로 개울이 흐르는 것을 발견한다.) 

아이1: 어? 담 밑이 뚫려 있어요. 

아이2: 뭔가 불안해 보이는데 임시로 돌을 쌓아놓은 건가요?

어른: 아니야. 그렇지 않아. 산 북쪽에서 흐르는 물이 담장 밑을 통과해 자연스럽게 소쇄원 중심을 지나갈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수문이야. 제각각으로 생긴 돌을 괴어 인공적인 느낌을 최대한 감추려 하였고 보기엔 저래도 500년 동안 아무 탈 없이 제 역할을 하고 있단다. 

아이1: 에에? 500년이나요? 

어른: 행여 돌이 넘어진대도 '허허. 다시 쌓으면 되지'하고 가볍게 여기시지 않았을까? 어차피 자연이란 세월이 흐르면서 움직이거나 사라지기도 하면서 계속 변해가는 거잖아. 물길이 거세어져 돌이 쓰러진다면 그것도 자연이 준 운명인 셈이지.

아이2: 그게 자연에 순응한다는 동양적 생각인가요?

어른: 응. 앞으로 아시아의 다른 건축들을 보면 알겠지만 특히 한국적인 경우에서 더 잘 읽을 수 있단다.


(광풍각에서)

어른: 자~ 우리가 앉아 있는 이 곳은 광풍각이라는 곳이고 저 위로 보이는 건물은 제월당이라고 한단다. 광풍각이 방문객들을 위한 곳이라면 제월당은 주인이 사는 집이야. 이전에 배웠듯 각각의 건물은 규모로 구분할 수 있는데 광풍각은 정면 3칸, 측면 3칸이고 제월당은 정면 3칸에 측면 1칸으로 조금 작아. 둘 다 팔작지붕을 얹었고 온돌바닥을 갖추어 겨울에도 제법 따뜻하게 지낼 수 있게 했지. 

아이1: 그럼 여기서 계속 사람이 살았던 건가요? 

어른: 그런 건 아니고 이런 곳을 보통 별서라고 하거든? 별서라는 것은 거주 목적의 집 근처에 지은 일종의 별장이나 마찬가지인데 특별히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곳에 위치하는 경우에는 별서라 부른단다. 그러니 출퇴근 하는 일종의 야외 공부방이라고 할 수 있지. 

아이2: 하지만 정원이라고 했잖아요? 정원은 나무와 꽃을 가꾸기 위한 곳 아닌가요? 

어른: 응. 물론 이 곳에서도 지금 보이듯이 여러가지 나무와 꽃이 한데 어우러져 있고 이 모든 것들은 다 위치와 종류에 따라 제각각의 의미를 담고 있단다. 철학적으로 가꾼 정원이랄까? 그런데 보통 우리는 이 곳을 정원이라고 얘기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소쇄원은 원림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아.

아이1: 원님이요? 

어른: 원님이 아니고 원림(園林). 정원이 주택들 가운데 인위적으로 동산의 분위기를 연출한 것이라면 원림은 동산과 숲의 자연 풍경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내부에 정자나 집을 배치한 것을 뜻해. 게다가 정원은 식민지 시대에 일본에서 들여온 개념이라 우리식으로 얘기하자면 원림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단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원림을 만든 사람은 양산보(1503~1557)라는 선비인데 그의 호가 소쇄옹인 까닭에 소쇄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어. 소쇄(瀟灑)는 시원하고 깨끗하다는 뜻이 있거든. 대나무 숲과 개울가에서 나는 소리를 들어보면 잡생각이 사라지고 기분이 절로 상쾌해지지 않니?

아이1: 쿨....

어른: 얘는 너무 편안한지 벌써 잠이 들었네. 하긴 시내에서 꽤 떨어진 곳까지 왔으니 무리도 아니지.

양산보는 너희들보다 조금 더 컸던 열다섯이 되던 해 정암 조광조의 제자로 들어갔어. 조광조는 당시에 곧은 성격과 바른 품성으로 사림들의 지지를 얻고 있었던 학자였거든. 그런데 이를 시기하던 세력이 꾀를 부려서 결국 임금이 하사한 사약을 먹을 수 밖에 없게 되었지. 그때 양산보는 겨우 열일곱 이었는데 스승의 억울한 죽음으로 부터 큰 충격을 받았던 것 같아. 모름지기 사람은 때를 잘 만나지 않으면 그 큰 뜻을 펼치지 못한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속세와 인연을 끊고 고향에 내려와 일찌감치 여생을 보낼 장소를 만들게 된 거란다. 

아이2: 그럼 십대 때부터 이런 곳을 만들기 시작한 거에요?

어른: 본격적으로 원림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삼십대였지만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은 이십대부터 그에 대한 꿈을 조금씩 키워갔었던 모양이야. 그리고 평생을 소쇄원에서 공부하는 데 보냈으니까 돈이나 권력에 대한 욕심 없이 참 바람직한 삶을 살다 가신 분이였지.

아이2: 에이. 그래도 이 산 속에서 혼자 있으려면 심심했겠어요.

어른: 그래서 다른 선비들이 자주 찾아와서 공부도 하고 휴식도 취하라고 광풍각이며 대봉대며 마련한 것이 아니겠니? 덕분에 여러 사람들과 친분을 쌓을 수 있었고 이 곳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글귀와 시가 많이 남아 있단다. 

아이2: 그래서 이렇게 작은 장소에 대해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거군요?

어른: 대표적으로 양산보의 친척인 김인후라는 사람이 48영 한시를 써서 소쇄원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렸지. 원래는 싯구를 담장에 걸었는데 지금은 제월당에 가면 볼 수 있어. 

아이2: 영이 뭐죠? young?

어른: 영(詠)은 노래하다 또는 시를 짓다라는 뜻인데 48영이라고 하면 마흔여덟개의 시를 의미하지.   

아이2: 와. 정말 많이도 썼네요.

어른: 응. 그래서 지금 우리가 그때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와 생각들을 짐작하는 자료로 쓰이지.

아이2: 소쇄원에 대해 모르는게 없겠어요.

어른: 하하. 꼭 그렇지만도 않아. 옛부터 우리 조상들은 많은 의미와 철학을 담아서 터전을 만들었거든. 여전히 풀리지 않은 비밀들이 남아 있단다.

아이2: 그게 뭔데요?

어른: 여기 소쇄원도를 보면 개울 남쪽으로 인공 연못이 두개가 있지? 

아이2: 예. 하나는 대봉대 옆에 있는 거 아니었어요?

어른: 응. 그런데 그 연못을 수직으로 마주보고 있는 건물은 각각 광풍각과 제월당이거든. 그 연못의 너비와 별당의 바닥 면적이 서로 약속한 듯이 비슷하단다.     

아이2: 그게 무슨 의미죠?

어른: 글쎄. 아직 특별한 의미를 찾지는 못했지만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그 위치나 크기가 예사롭지 않게 보이나봐. 언젠가 그 뜻을 헤아릴 날도 오겠지.

아이2: 서양 건축에서 흔히 나타나는 상징성과 스케일이 여기에도 있군요.

어른: 그걸 기억하고 있다니. 정말 똑똑한데? 건축 안에 많은 이야기를 담았다는 사실은 동서양이 다를 바 없어.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그 뜻을 일일이 찾아내고 해석하는 것 보다 이렇게 한가로이 마루에 앉아서 자연과 하나 되길 바랬던 소쇄옹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 우선이지 아닐까? 그러니까 오늘은 그냥 한껏 쉬다가 가자꾸나.  


→ 소쇄원 공식 홈페이지

판테온이라는 이름은 '모든'을 뜻하는 '판(pan)'과 '신'을 가리키는 '테온(theon)' 두 단어를 합친 말로 모든 신을 위한 신전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여러 신을 함께 숭배했던 고대 로마인들은 인근지역을 무력으로 정복하더라도 신을 향한 그들의 믿음까지 빼앗지는 않았어요. 다신교 문화를 바탕으로 종교의 다양성을 존중 하다 보니 시간이 갈수록 모시는 신의 숫자는 늘어만 갔고, 30만에 가까울 정도로 많은 신이 존재하다보니 그리스의 경우처럼 특정 신 한 명을 위해 신전을 세울 수 없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결국 누구하나 섭섭하지 않게 모든 신들을 아우르는 건물을 짓게 된 데에는 이러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죠. 


로톤다광장에는 판테온을 보러온 관광객들로 가득합니다. 로마에 가면 꼭 방문해야 한다고 안내 책자에서 강조하는 것에 비해 밖에서 보이는 건물은 무척이나 초라하고 낡았습니다. 교회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그 흔한 조각 한 점 달려있지 않고 입구를 떠받치는 16개의 코린트식 기둥에 장식된 잎사귀들은 죄다 벌레 먹은 듯 끝이 닳아 있습니다. 국가의 보물이자 신성한 신전은 명성에 걸맞지 않게 방문객들의 소란스런 왕래에도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스고전 양식으로 구성된 입구 정면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흔적이란 M.AGRIPPA.L.F.COS.TERTIVM.FECIT라고 쓰인 라틴어뿐인데 이는 루시우스의 아들인 마르쿠스 아그리빠가 세 번째 집정관 임기에 만들었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현재의 판테온은 아그리빠라는 사람이 만든 것일까요? 그 역사적 기원에 대해서 잠시 짚어보기로 하겠습니다.


아그리빠는 황제 카이사르가 양자인 옥타비아누스의 부족한 면을 채워주기 위해 발탁한 시골출신의 병사였습니다. 카이사르가 기대한 대로 아그리빠는 군인과 정치가로서의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고 옥타비아누스가 훗날 로마제국의 황제가 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가난한 시골 출신에서 제국의 2인자가 된 아그리빠는 항상 카이사르와 신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았고 기원전 25년에 판테온을 지어 모든 영광을 고인이 된 황제 카이사르와 자신을 지켜준 로마의 모든 신들에게 바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사각형이었던 최초의 판테온은 불행하게도 기원후 80년에 대화재로 불타 버리고도 미티아누스에 의해 다시 지어진 건물은 110년에 벼락을 맞고 보수가 불가능할 정도로 훼손되었습니다. 결국 118년 하드리아누스황제에 의해 새롭게 계획되어 128년에 공사를 마친 세 번째 건물이 현재 우리가 보는 판테온인 것 입니다. 보통은 건축물에 대해서 건축가의 이름이 기록되는데 비해 어디에서도 건축가를 찾아 볼 수 없고 오직 하드리아누스황제의 이름만 남아있는 이유는 왜일까요? 그리고 아그리빠의 이름을 건물에 새겼던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하드리아누스는 다른 황제와 달리 건축과 도시계획에 관심이 많았고 예술적 재능이 풍부했던 까닭에 건물 형태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공하기도 하였습니다. 판테온의 경우 역시 기본적인 계획은 황제에 의해 이루어지고 실제 공사에 관한 세부적인 문제들만 건축가들이 관여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스스로의 위대한 창조물을 아그리빠의 공으로 돌린 것은 최초 건설자에 대한 존경심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위대한 황제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아그리빠를 기념함으로써 본인의 정통성을 은근히 강조하려는 정치적인 이유도 담겨 있습니다.


입구에 가까이 갈수록 수 세기에 걸쳐 새겨진 상처들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이집트에서 수입된 붉은 화강암 기둥은 거칠고 색이 바랬으며 발코니 지붕을 덮었다던 청동은 오간 데 없고 새까만 나무 구조가 부끄럽게 속살을 노출 하였습니다. 모든 신들을 위해 봉헌 되었던 신전은 609년 동로마제국의 황제 포카스가 교황 보니파시오 4세에게 소유권을 넘기면서 기독교의 신을 위한 성당으로 한순간에 운명이 뒤바뀝니다. 기독교의 보호 아래 그토록 오랜 세월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외부로 드러난 질 좋은 대리석과 건물 정면을 장식하던 조각들이 약탈당하는 것 까지 막기는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663년 콘스탄티우스황제는 로마를 방문하는 12일 동안 값어치 있는 장식품들과 청동기와를 모두 가져가 버렸고, 17세기 초 교황우르바노 8세는 산탄젤로 성의 방어를 위해 입구 천장을 덮은 청동 25톤을 모두 녹여 대포를 만들었습니다. 햇빛을 반사하며 반짝거리던 화려함은 어느새 콘크리트와 벽돌만 남아 칙칙해졌습니다. 조각들을 매달기 위해 여기저기 구멍이 흉하게 뚫린 페디먼트 밑을 지나 오랜 노력 끝에 복원한 청동 문을 열고 실내로 들어가 봅니다.


아! 하늘을 덮은 거대한 돔 지붕이 만든 실내공간은 정말로 거대하고 경이롭습니다. 지름 43.3m의 공이 들어간다면 바닥에 그 끝이 정확히 맞닿을 정도로 정교하게 짜인 내부는 공학과 수학이 이룩한 건축의 기적입니다. 일반 건물 15층 높이에 달하는 천장에서부터 1층으로 전달되는 콘크리트 무게를 줄이기 위해 아래에서 위로 갈수록 벽의 두께는 얇아지고 재료도 비교적 가벼운 돌들로 이루어졌습니다. 단단하고 무거운 석회질로 구성된 1층 벽은 무려 6.2m나 될 정도로 두꺼우니 웬만한 폭탄에도 끄떡없을 것 같네요. 콘크리트가 굳는 속도를 빠르게 하고 무게를 줄이기 위해 사각형 모양으로 촘촘하게 판 벽면은 입체적인 패턴을 이루며 장식적인 효과까지 달성했으니 일석삼조입니다. 이후 모든 돔 구조에 영향을 미치게 된 판테온의 돔은 시작부터 얄미울 정도로 완벽한 모습을 갖추었네요. 유일하게 뚫린 머리꼭대기의 둥근 창을 통과한 강렬한 햇살이 바닥에 눈부신 원을 그려냅니다. 거대한 실내를 가르는 한줄기 빛을 따라 사람들이 서서히 움직이는 모습이 재밌습니다. 실내를 밝히고 공기를 순환시키는 9m 지름의 창은 비가 내리면 더운 실내 공기를 밖으로 뿜어내면서 내부에 떨어지려는 빗물을 밀어 낼 정도로 과학적입니다.   


실내에 들어서기까지 앞만 보고 걸었던 사람들은 둥근 창을 보기위해 고개를 들고 한참을 서 있습니다. 고대로마 때부터 사람들은 하늘을 우러러보며 각자의 위대한 신에게 기도를 올렸겠지요. 인간의 시선이 수직을 향하면서 저 하늘 너머 어딘가에 있을 신의 위대함을 실감하게 됩니다. 그래서 판테온의 둥근 지붕은 하늘을 닮은 것 입니다. 하늘은 둥글다는 당시의 생각이 이러한 공간을 만들게 된 이유인 셈이지요. 욕심이 많은 누군가가 사각형문양 가운데 하나씩 달려있던 금장식을 훔쳐가기 전에는 우주에서 빛나는 별들과 같이 신비로운 반짝거림이 하늘 가득했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신의세계가 황홀하게 펼쳐졌으리라 짐작됩니다. 고대그리스는 맑고 온화한 지중해성 기후로 인해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종교의식이 대부분 야외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다보니 신전은 외부를 향해 열려있고 상대적으로 내부공간에 대한 관심은 덜하였습니다. 하지만 로마의 건축은 성당이나 공동목욕장에서 알 수 있듯이 중요한 행위들이 내부에서 일어나며 따라서 어떻게 하면 실내를 더욱 웅장하고 아름답게 만들 수 있을까 생각을 바꾸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의 의식에 따라 건축공간이 역전되는 큰 변화를 2000년이 지난 지금의 판테온에서도 변함없이 읽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 쓰러져가는 외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장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가치를 인정받아야 하는 것이지요. 르네상스이후로 유명인사들의 무덤으로 사용된 판테온은 비록 신성한 건축으로서의 기능을 잃었지만 그 자체로 신화가 되기에 충분합니다.


* NESO(네덜란드 교육진흥원)의 의뢰를 받고 5월 말에 작성했던 유학 경험담을 올립니다.  


제가 네덜란드와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결코 대단치 않습니다. 미국, 영국을 제외하고 영어로 건축 석사 과정을 밟을 수 있는 곳은 그리 많지 않으니까요. 물론 나중에 합격 통지를 받고 고민을 하긴 했습니다. 가히 세계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더군다나 장학금도 받을 수 있었던 뉴욕의 학교를 갈 것인가 아니면, 물가가 상대적으로 저렴하되 전혀 모르는 세계에서 나만의 삶을 개척해 나갈 것인가 말이죠. 결국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호하는 뉴욕을 대신해 네덜란드 로테르담을 선택하게된 것은 어디까지나 주류에서 일탈하면서 남과 다른 삶을 살고자 하는 반항적 원심력 때문이었습니다. 더불어 유럽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미디어를 통해 어설프게 접한 네덜란드 현대 건축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미국보다 저렴한 물가가 주요하게 작용했습니다. 기술하고 보니 부끄럽지만 역시 그렇게 설득력 있는 이유는 아니군요. 철저한 준비 없이 무작정 유학을 다녀왔지만 결과만 따져봤을 때 무척이나 성공적이라 생각됩니다. 3년 동안 쌓은 풍부하고 특별한 경험들은 제가 성장을 하고 진짜 하고 싶은 길을 찾아갈 수 있는 용기와 자신감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너무도 개인적인 취향이 개입되고 뒤늦게 깨달은 점이 더 많지만 네덜란드에서 공부를 계획하고 있는 여러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내용들이기를 희망하면서 제가 생각하는 네덜란드의 열 가지 특징에 대해 적어보겠습니다.


1. 소박한 삶

실용적이고 검소한 그네들의 삶은 프로테스탄트 정신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습니다. 치열한 종교 대립의 역사는 화려한 장식으로 뒤덮인 성당과 국가적 상징들을 파괴하였지만 노동을 신성시하고 소박하고 평범한 삶이 일상에 뿌리박히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신을 적극적으로 영접하기 위한 마음과 외부 풍경을 내면화하려는 의도가 만든 커다란 창문으로 인해 집 내부는 민망할 정도로 바깥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호기심에 안을 들여다보면 금새 실망하기 마련인 것이 내부엔 별로 자랑할 만한 물건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냥 보통의 삶 그 자체입니다. 거리로 나서면 수십 년은 족히 돼 보이는 연식의 올드카들과 중소형 차들이 주종을 이루고 우리에게 익숙한 메이커의 옷이나 신발을 신은 사람들을 찾아보기가 여간해서 쉽지 않습니다. 특별히 옷에 신경 쓸 필요도 없고 정 옷이 필요해서 사야한다면 HEMA와 같은 저가 매장 혹은 아울렛을 들르거나 크리스마스 세일을 이용하면 됩니다. 우리나라에서 성인 여성들이 좋아한다던 오일릴리도 네덜란드 브랜드인가 싶을 정도로 희귀한 존재였습니다. 그들에게는 굳이 보이는 것을 통해 무언가를 내세우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 내실을 다지고 절약하는 태도가 배울만한 점입니다. 


2. 자연환경

네덜란드는 모두 아시다시피 국토의 1/3이 해수면보다 낮으며 대부분의 땅은 인간의 노동으로 만들어진 것 입니다. 덕분에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인공적인 풍경을 접할 수 있는데 이것이 또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댐으로 물을 가두고 풍차로 바닷물을 퍼낸 후 다른 곳의 땅을 파서 나온 토양으로 새로운 매립지를 만드는 과정을 거칩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평탄한 대지에 집과 마을이 서고, 흙을 파서 움푹 파인 땅은 담수를 채워 호수를 만들고 주변을 공원화 시킵니다. 개천과 같은 인공 운하가 도시 곳곳에 그물망처럼 발달해 있고 자전거타고 15분 정도만 가면 광활한 호수가 그림같이 펼쳐집니다. 사방이 평평한 까닭에 자전거가 손쉬운 이동 수단이 되고 노인들은 전동기구에 몸을 의지하더라도 자유롭게 외출할 수 있습니다. 산이 없다는 사실이 그들에겐 일종의 집단적 콤플렉스일지 모르겠지만 세상을 가르는 단순한 수평선은 그들만의 자랑이고 조금만 높은 곳에 오르면 네덜란드 전체가 한 눈에 보일 듯 시원한 전망이 펼쳐집니다. 


3. 사회적 가치

개개인의 취향과 의견을 존중하는 자세는 다양성으로 표현됩니다. 또한 네덜란드의 '폴더 모델'이 표방하듯 소수의 의견을 묵살하기 보다는 가급적 모두가 만족할 수 있을만한 타협점을 찾으며 이를 위해 상대방에 대한 관용을 베풀기도 합니다. 이는 열악한 자연 조건과 투쟁했던 오랜 역사에서 기원을 찾습니다. 태풍이 불고 댐이 무너질 때 모두가 협력하지 않는다면 누구도 생존할 수 없는 급박한 상황이 개개인의 중요성을 일깨웠습니다. 게다가 작은 국토에 1700만 명이나 거주하는 까닭에 상대적으로 높은 인구밀도를 자랑하는 네덜란드에서 공존의 문제는 앞으로도 가장 중요한 이슈가 아닌가 싶습니다. 결국 모두가 한 배를 탄 운명이라는 공동체 의식은 개인의 자유 뿐 아니라 타인의 자유도 중요하게 생각하며 개인이 갖는 개성이 사회를 다채롭게 가꾸는 원동력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좁은 땅에서 오밀조밀 벽을 맞대고 있는 전통 주거들을 보면 그 형식은 유사하지만 한 동 한 동의 모습은 조금씩의 차이가 있습니다. 일정한 규칙 내에서 다양한 모습을 구현하려는 전통은 곳곳에 신도시가 들어선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한 가치입니다. 인종, 종교, 직업, 나이, 경제력 등으로 대변되는 획일성을 거부하려는 자세는 남들과 다른 삶을 살고 싶었던 제게 더없이 좋은 바탕이 되었습니다.


4. 교육

제가 다닌 베를라헤 인스티튜트는 건축 전문대학원이기 때문에 학교만의 고유한 교육 프로그램을 갖추고 있습니다. 일종의 연구소이기 때문에 공동의 목표를 위해 최선을 다하도록 유도하고 있으며 성적이 없어 과도한 경쟁을 미연에 방지하고 본인이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있습니다. 고리타분한 선후배관계와 수직하향적 사제관계가 전부였던 삶에서 교수와 학생이 본인의 의견이 옳다고 서로 주장을 굽히지 않는 모습은 충격에 가까웠습니다. 학교의 교육 방침도 일방적인 명령 전달이 아니라 학생의 동의를 구하는 것이 전제되어 있으며 공부하고 싶은 주제와 강사를 선정하는 것도 전적으로 학생들의 의사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학교의 주인은 학생이고 학생은 사회적으로 동일한 건축가이지 일방적으로 가르침을 받아야 하고 교수의 사적인 업무를 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학생이 잘못된 방향으로 연구를 진행한다거나 교수가 더 좋은 아이디어를 갖고 있다면 얼마든지 교수의 의견이 개입될 수 있겠으나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가 본인의 작업에 대해 자부심과 신뢰를 갖고 있냐는 사실입니다. 서로 다른 견해로 한바탕 크게 교수와 싸운 뒤 다음날 교수가 먼저 '우리 아직 친구인거지?'라고 묻거나, 힘들게 학기를 마쳤을 때 '그래서 넌 너의 결과에 만족하니?'라고 묻는다면 즐겁게 공부할 맛이 나지 않을까요.


5. 미술관

어느 유럽이 그렇지 않겠냐만은 네덜란드 또한 대단한 예술적 자산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17세기 황금시대를 누리던 당시의 렘브란트가 그랬고 그 뒤로 베르메르, 반 고흐, 몬드리안, 에셔 등의 걸출한 대가들이 예술사에 큰 획을 그어 왔습니다. 스페인의 프라도 미술관이나 프랑스의 르부르 박물관 못지않게 각 도시에는 다채로운 미술 전시장이 있으며 이들을 찾아다니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즐거운 여정이었습니다. 뮤지엄카드라는 것을 한 번 사면 거의 모든 뮤지엄을 무료로 입장할 수 있으며 국토가 상대적으로 작고 열차 네트워크가 잘 발달된 까닭에 다른 도시로 이동하는 것이 전혀 부담스럽지 않습니다. 흐로닝거, 반 고흐, 레익스, 렘브란트, 코브라, 보에이만스, 쿤스트할, 데 퐁트, 크뢸러뮐러, 반 아베, 마우리츠하위스, 본넨파텐 그리고 각 도시의 시립 미술관까지 섭렵하고 나니 이 좋은 곳을 혼자만 다닌 것이 너무 안타까울 뿐 입니다. 엘 리시츠키의 '프로운 라움'을 복원한 것을 아인트호벤에 위치한 반 아베 뮤지엄에서 뜻하지 않게 만났을 때, 그렇게 좋아하던 반 고흐의 '밤의 카페'를 크뢸러뮐러 미술관에서 보았을 때 느꼈던 반가움과 경이를 잘 간직해서 기회가 된다면 작은 책자로라도 만들어 공유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6. 축구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유럽은 그저 천국일 수 밖에 없습니다. 돈을 낼 여유가 없어서 리그전을 티비로 챙겨 볼 수는 없지만 주말 저녁 하일라이트 편집 방송만 봐도 충분히 한 주의 스트레스가 풀립니다. 제가 있던 당시는 2002년 월드컵의 감동이 박지성, 이영표, 송종국의 네덜란드 리그 진출로 이어졌고 특히 히딩크가 감독을 맡았던 PSV아인트호벤에서의 한국 선수들의 활약은 괜히 뿌듯하기까지 했습니다. 다행이도 챔피언스리그는 공중파 방송에서 중계해 주었기 때문에 학교에서 각국의 친구들과 하나 되어 경기를 관전할 수 있었고 결승전이 있는 날이면 학교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대형 화면 앞에 모여 흥겨운 관전을 하곤 했습니다. 특히나 한국에서처럼 뜬 눈으로 밤을 새우지 않고 유럽 축구를 볼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즐거움입니다. 여기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암스텔, 하이네켄, 흐롤쉬, 헤르토흐 얀 등으로 대표되는 네덜란드 맥주들이겠죠. 학교 갤러리에서 맥주병을 들고 삼삼오오 모여 왁자지껄 떠들다 보면 괜히 우정도 깊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7. 자취 생활

유학을 가게 된 스물여덟이 되도록 가족과 떨어져 살아 본 경험이 없습니다. 그런 제게 자취 생활은 일종의 로망이나 다름없었죠. 그렇지만 외국에서 자취하기란 일단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만만치 않습니다. 집세가 다른 학생들보다 1.5배 많이 들고 식재료를 사 놓아도 음식을 해 먹을 시간이 없어서 다 못 먹고 버린 적도 많습니다. 세금도 혼자 내야 하니까 그만큼 부담이 크죠. 친구들과 함께 살게 되면 외롭지 않고 가끔 그들이 해 주는 음식을 먹을 수도 있으며 집에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함께 해결하는 장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전혀 다른 배경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 살아야 하기 때문에 서로 서로 앙금이 쌓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외국 친구들이 너무 자주 파티를 하다보면 집에서 조용히 쉬고 싶은 사람에게는 큰 민폐나 다름없지요. 저는 집을 처음에 구할 때 사기도 맞아봤고 집 주인이 보증금을 반만 돌려주려고 해서 변호사도 선임해보려고 했고 뜻하지 않게 이사를 하게 되어 짧은 시간에 집을 찾느라 맘고생도 심하게 했었습니다. 심한 바람에 창문이 깨지거나 갑자기 물이 나오지 않아 수리공을 부르기도 하고 윗집 화장실 배관이 터져 하얀 벽을 타고 화장실 오수가 흐르는 비극을 맞이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집은 언제나 제게 편안한 안식처였습니다. 학교 공부로 지친 몸을 이끌고 아늑한 집에서 영화를 보거나 티비를 보면서 쉬는 시간이 제겐 가장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내 공간에서 내 맘대로 해도 누가 뭐라 하지 않는 자유는 인생에서 처음 맛보는 달콤한 것이었죠. 


8. 외국어 구사력

고등교육을 마친 유럽의 젊은이들은 영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할 뿐 아니라 보통 3개 국어, 많게는 4개 국어를 구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방학 때 여행을 하다 보면 영어가 통하지 않는 답답한 상황을 자주 접하게 될 것 입니다. 네덜란드는 전 세계를 무대로 장사를 하던 역사가 있고 지리적으로 영국과 가깝기 때문인지 전반적으로 영어가 생활 깊숙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수퍼마켓이나 카페의 종업원은 물론이요 중국 음식점을 경영하는 중국 이민자도 영어 대화에 무척이나 능숙합니다. 심지어 거지도 영어로 구걸을 할 정도이니 영어 하나만 잘 해도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우리나라와는 참으로 대비되는 모습입니다. 게다가 속도와 발음이 친절한 까닭에 학교에서만 배운 한국인 영어 실력으로도 충분히 생활을 잘 영위할 수 있습니다. 네덜란드어를 전혀 할 줄 모르지만 그래서 곤란한 처지에 놓인 적은 한 번도 없고 영어를 못 하는 네덜란드인도 쉬운 영단어들은 잘 이해하며 행정 기관에서 보내는 네덜란드어로 된 편지들은 학교 직원이 친절히 해석해주니 불편함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것 중의 하나가 네덜란드어를 하지 않고도 네덜란드에서 살 수 있냐는 것인데, 물론 네덜란드어를 하면 그쪽 사회와 쉽게 동화되는 장점이 있겠지만 기본 생활을 꾸려나가는 데 있어서는 문제가 없었다는 것이 저의 대답입니다.


9. 건축

네덜란드는 기념비적 건물을 만들어 내세우기 보다는 생존을 위해 수시로 댐을 만들고 물길을 트고 매립지를 만드는데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다보니 관광객을 끌어들일만한 국가적 상징이 부족합니다. 에펠탑, 타워브릿지, 콜로세움, 사그리다 파밀리아 등 이름만 들어도 그 나라가 연상될만한 건물이 없습니다. 기껏해야 풍차 정도일까요. 그래서 도시 상징물들을 배경으로 화려한 불꽃놀이를 선보이는 다른 나라와는 달리 네덜란드의 새해맞이는 무척이나 소박합니다. 암스테르담 담광장에 모여든 사람들이 카운트다운을 하며 넋 놓고 바라볼 대상이 없지요. 그냥 각자 음악에 맞춰 춤추고 알아서 폭죽 터트리고 맥주 마시고 그게 전부입니다. 건축은 특정한 권위나 이데올로기를 강조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삶이 펼쳐지는 무대인 것입니다. 경제적이고 기능적이며 실용적인 가치가 우선시됨으로 인해 자칫 지루하고 획일적인 디자인들이 판을 칠 수도 있겠지만 실상 네덜란드의 현대건축은 과감하고 실험적이고 다양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네덜란드가 현대 건축의 전시장으로 불리게 된 까닭은 알랭 드 보통이 만든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알 수 있었습니다. 알랭 드 보통이 헤이그 인근의 신도시를 둘러보며 당시 네덜란드건축협회 디렉터였던 애런 베츠키에게 그 이유를 물어봅니다. 애런 베츠키가 대답하기를 "네덜란드는 생존을 위해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습니다. 정체된 상태는 곧 부패와 죽음으로 이어지지요.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변화하고 실험적인 건축이 탄생하는 것 입니다." 결국 네덜란드에 있어 태생적으로 결핍된 부분은 거꾸로 토목, 건축, 도시 계획, 조경이 발달하게 하는 기회이자 자극제인 셈입니다. 네덜란드는 국제 규모의 비엔날레를 유치하고 다수의 건축 센터들과 OMA, MVRDV, West8, Neutelings Riedijk, UNstudio 등으로 대표되는 세계적인 건축 설계사무소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건축이 화제가 되고 관광 상품이 되는 것은 네덜란드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며 그러한 대상들이 관광객들의 방문만 기다리는 죽은 건물들이 아니라 여전히 삶의 일부로서 깊이 관계하고 있다는 것은 이들만이 갖고 있는 특징이자 자랑입니다.


10. 건강

자전거를 주로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건강은 자연히 따라오는 혜택입니다. 또한 자전거와 기차를 통한 이동은 차량 사용으로 인한 에너지 낭비와 환경오염의 해결책이 되기도 합니다. 디젤 차량 이용이 많은 유럽에서 네덜란드의 평탄한 지형은 또 하나의 행운이기도 합니다. 거세게 부는 바람과 잦은 강우는 매연을 씻어내며 건강한 환경을 선물해 줍니다. 곳곳에 호수와 운하가 있기 때문에 건조하지 않고 염분을 머금은 바람은 피부에도 좋습니다. 저는 어렸을 적부터 아토피로 심하게 고생을 해 왔는데 네덜란드에 가면 기적처럼 피부가 깨끗해져서 무척이나 행복했습니다. 미국 드라마 '로스트'를 보면 이상한 섬이 등장합니다. 그곳에 가면 앉은뱅이는 일어서고 죽은 사람은 살아납니다. 모두에게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그런 기적을 접하는 사람들이 몇몇 등장하며 저도 그런 사람 중에 한 명이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잠자기 힘들 정도로 고통스럽게 가려운 피부가 로테르담 집에 오는 순간부터 온순하게 바뀌었죠. 독일에서 공부를 했던 친척 형은 몸이 아플 때마다 네덜란드의 바닷가를 찾아 왔습니다. 내륙인 독일에서 접할 수 없는 자연 환경은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겠지만 병을 치유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 것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에너지와 환경에 대한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는 요즘 네덜란드는 많은 범례를 제공할 것입니다.


이상 솔직하고 격의 없이 제가 네덜란드에 관한 열 가지 특징을 적어 보았습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건 결국 본인의 의지와 자세가 중요하다는 것이 저의 지론입니다. 저는 네덜란드에서 공부를 했기에 네덜란드를 얘기할 수 있는 것이고 미국에서 있었다면 미국의 장점들을 찾아 봤겠지요. 물론 네덜란드를 떠나고 싶은 이유도 열 가지 이상 찾아볼 수 있고 대부분의 학생들은 공부를 마치면 런던과 같은 대도시의 삶을 동경하며 떠납니다. 네덜란드는 너무 작고 심심하다는 것이죠. 하지만 본인이 어떤 상황에 처했건 자신이 속한 곳에 대해 알아보려고 노력하는 자세는 꼭 필요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배움에 대해서는 만족할 수 있지만 정작 본인의 삶 자체에 대해서는 특별한 애정을 가질 수 없겠지요. 지금은 비록 네덜란드를 떠나와 있지만 그 때의 경험은 평생토록 좋은 밑거름이 될 것이라 자부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인연을 계속 이어가고 보다 가치 있는 컨텐츠를 만들어 내는 것이 저의 영원한 숙제라고 생각합니다. 네덜란드에서 유학을 꿈꾸는 모든 분들께 좋은 결과가 함께하기를 기원하며 이 글을 마칩니다.

한 번 결정을 했으면 꿋꿋이 밀고 나갈 필요가 있다.
내가 가진 거라고는 인생 그거 밖에 더 있겠는가.
 
아 망했어요.
누구라고 밝히기 미안할 정도의 그림이...흑 흑
베껴 그리는 데에도 이렇게 거지같은 결과가.
역시 타블렛은 무리 무리.
그림에 대한 의욕이 이틀만에 간단히 꺾이는 군요.
사진은 필름이듯, 그림은 종이와 연필인가.

힘들어서 단어장도 못 쓰고 자야겠다.

* 오늘 북카페에서 읽은 보그 2007년 8월호 별책부록 '도시 그리고 여자'는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꾸준히 글을 쓰다보면 기가 막힌 문장력을 보여줬던 그 카피라이터의 수준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까.
  감성과 사고가 깊어질 만큼 경험이 쌓인다는 사실에서 나이를 먹어가는 기쁨을 찾을 수 있었음 한다.

인터넷을 통해 무궁무진한 세계를 알게된 후 일과 속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던 그림 그리기가 한참이나 뒤로 밀렸다.
어렸을 적 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고 만화에 정신이 팔려 사춘기마저 모르고 지나갔던 인생인데
너무도 어색한 나의 그림들에게 미안해진다. 
이제는 길었던 외도를 마치고 다시 펜을 잡는다. 
1. 낮과 밤의 변화는 정말 다이나믹 하지 않은가.
밤에는 또 하나의 세상이 열리는 한국은 좋은 곳이다.

2. 오늘은 가로수 길에서 가장 많은 미녀들을 본 날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것이 자연미인지 인공미인지 찰나의 순간에는 판단이 서질 않는다.
어쨌든 나를 위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3. 커다란 개는 여성을 유혹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와 같았다.
'커피스미스'에는 항상 검은 개 두마리와 함께 하는 사람이 있고
'모퉁이'에는 골든 리트리버 한 마리가 모두에게 아낌 없는 애정을 표현한다.

4. 오기사디자인의 구름 학교 프로젝트.
학교에 구름을 만들면 아이들은 자라서 여전히 구름 위를 걷게 된다.

5. 이번 카메라 거래를 되돌아 볼 때
나는 여전히 사람을 잘 믿고 때문에 앞으로도 사기를 맞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왜 사람 앞에만 서면 마음이 열리는 걸까.
절대 세일즈를 하거나 돈을 많이 벌 타입은 아닌 것 같다.

* 단어장
구미-매일같이 충족시켜야 한다는 점에서 성욕에 우선한다.
절연-인연을 단절하다.
흘레-동물간의 하나 됨. 개의 흘레에는 독특한 메카니즘이 존재한다.
남자들의 경우 양변기에 앉아서 소변을 보는 것에 대해 상당히 거부감을 갖는다는 사실에 놀랐다.
하지만 앉아서 일을 보면 편하기도 하고 사방으로 물 쏟아지는 소리를 낼 필요도 없고
조준을 할 필요도 없고 무엇보다도 위생적이기까지 하다.
나의 경우도 30년 넘게 가졌던 습관이 어느 날 갑자기 변한다는 것에 거부감이 있었으나 
흡족해 하시는 어머니의 표정을 보니 이 것도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도움이란 생각에
꾸준한 실행을 거듭하다 보니 너무도 익숙해져 버렸다.
잠이 덜 깬 상태로 완벽한 뒷처리를 하고자 할 때 앉아서 일 보는 습관은 남자들이 갖추어야 할 미덕이 아닐까.

새로운 한 주를 앞두고 있는데 여전히 피로는 그대로.
다 합치면 열 두시간 쯤 잔 것 같은데 요즘 염증이 늘어서 인지 뻐근함과 피곤함이 상당하다.
어머니는 에구 이 게으른 자식 하시며 한 숨을 쉬시지만 
여자들 생리하는 것처럼 내 의지와 상관 없이 갑자기 그런 걸 어찌합니까.
그럼에도 지친 몸을 이끌고 한슬, 철환과 만나 스태미너 음식을 먹었으니 내일 쯤엔 효과가 나겠지.
아니 어쩜 가로수 길 카페에서 간접적으로 얻은 활력이 더욱 생기를 불어 넣었을지도...

* 단어장
햇귀-귀한 햇살
소격-누군가에 의해 탈중심화 되다
거쿨지다-명령조, 거침없음

일주일치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온 듯한 느낌의 저녁이다.
햇살을 가득 머금은 탓인지 좁은 가로수 길은 젊은 여자들로 가득찼고
수비수를 제치는 날렵함에도 불구하고 현저하게 느려지는 걸음은 어쩔 수 없었다.   
집에 오기 위해 신사동의 영역을 벗어나자 마자 낮의 영광과 함께 몸을 지탱하던 에너지가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고
emp 맞은 터미네이터처럼 굳은 잠을 취할 것 같다.

* 단어장
저축거리다-고등학교 때 매일같이 저축거렸다. 
파괴-아무리 거창한 재창조도 인위적인 파괴를 정당화할 수 없다.
복처리-재수 옴 붙은 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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