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2: 우와~ 영화에서 말고 실제로 이렇게 높은 대나무들을 보긴 처음이에요.
어른: 쭉쭉 뻗은 나무들이 만들어주는 그늘 덕분에 아주 시원하지 않니? 동양의 정서를 대표하는 풍경이기 때문에 네 말대로 대나무들은 영화에 자주 등장하곤 하지. 그런데 이 숲길은 대나무가 빼곡해 특별하기도 하지만 여기서부터가 소쇄원의 영역을 알리는 역할을 한단다.
아이1: 하지만 아직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걸요?
어른: 응. 그렇지. 우리가 사는 바깥 세계에서의 복잡함을 잊고 깨끗한 마음으로 소쇄원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긴 숲길을 걸어야 하는 준비과정이 필요하단다. 이 대나무들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자연의 세계로 서서히 우리를 안내하는 다리인 셈이지.
(갑자기 고양이가 먼저 달려 나간다.)
아이1: 앗! 시자! 혼자 가면 안 돼. 이런 빠르기도 하지.
아이2: 벌써 사라져 버렸어요.
어른: 괜찮아. 먼저 가서 쉬고 있겠지. 우리도 이제 거의 다 왔단다.
아이1: 정말요? 하지만 입구를 지나오지도 않았는데요?
어른: 응. 그게 소쇄원의 가장 큰 묘미 중의 하나란다. 저기 끊어진 담장이 보이지? 저 담장의 좌측으로 가면 소쇄원의 내부로 들어가는 거고 우측으로 가면 산길을 주욱 오르는 거야.
아이2: 큰 기대를 하고 온 사람들은 실망하겠는걸요?
어른: 여기서 부터가 소쇄원이요라고 엄격하게 정해놓은 것 보다 이렇게 대나무 숲길을 건너다가 자연스럽게 진입하는 방식에서 우리 선조들이 자연을 대하는 태도와 이를 건축에 반영하는데 있어 뛰어난 감각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우리 조상들은 과장되거나 꾸미는 것을 사양하고 자연과 자연스럽게 하나가 되길 바랬거든.
아이1: 자연과 자연스럽게라구요? 흠. 알듯 말듯 하네요.
(대봉대에 한가로이 누워있는 시자를 발견한다.)
아이2: 앗. 저기 시자가 누워있다.
아이1: 얌체같이 혼자만 편하게 드러누워 있다니.
어른: 이거 시자가 제대로 쉴 곳을 찾았구나. 여기는 대봉대(待鳳臺)라고 하는 작은 정자인데 주로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만든 장소야. 이름을 풀이하자면 전설의 동물인 봉황새를 기다린다는 의미인데 예로부터 봉황은 좋은 소식을 가져온다고 믿었거든. 봉황이 둥지를 틀고 산다는 벽오동나무와 열매를 먹는다는 대나무를 주변에 심었으니 손님을 봉황같이 여기고 귀하게 맞이하려는 세심한 배려가 느껴지지 않니?
아이1: 하지만 지금은 시자가 누워있으니 고양이 묘(猫)를 따서 대묘대라고 불러야겠네요.
어른: 하하. 그렇구나. 게다가 소쇄원 중앙을 가로질러 흐르는 계곡물을 끌어다 만든 연못에는 손님과 나누어 먹기 위해 물고기를 풀어 놓았다하니 시자가 이 장소를 탐내는 게 어쩌면 당연하게 생각되는구나.
아이2: 여기 쓰여 있는 한자는 어떻게 읽는 거죠?
어른: 응. 그건 애양단(愛陽壇)이라고 읽는 거란다. 이 ㄱ자로 꺾인 담장으로 둘러싸인 공간을 말하는 건데 햇살이 머물러 사시사철 따뜻하라는 마음과 함께 부모에 대한 지극한 효심이 녹아 있는 곳이지.
아이2: 누구의 부모인데요?
어른: 저런. 그러고 보니 정작 소쇄원을 만든 사람에 대한 얘기를 빼먹었구나. 소박하고 포근한 풍경에 취해 나도 모르게 내 역할을 까먹었었네. 그러기 전에 우리 다리를 건너서 저기 보이는 별당에서 얘기를 이어가보는 게 어때? 저기가 바로 이 정원의 사랑채로서 글도 읽고 시도 읊으며 학문을 하던 곳이거든.
(이동 중 담벼락 아래에 난 구멍으로 개울이 흐르는 것을 발견한다.)
아이1: 어? 담 밑이 뚫려 있어요.
아이2: 뭔가 불안해 보이는데 임시로 돌을 쌓아놓은 건가요?
어른: 아니야. 그렇지 않아. 산 북쪽에서 흐르는 물이 담장 밑을 통과해 자연스럽게 소쇄원 중심을 지나갈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수문이야. 제각각으로 생긴 돌을 괴어 인공적인 느낌을 최대한 감추려 하였고 보기엔 저래도 500년 동안 아무 탈 없이 제 역할을 하고 있단다.
아이1: 에에? 500년이나요?
어른: 행여 돌이 넘어진대도 '허허. 다시 쌓으면 되지'하고 가볍게 여기시지 않았을까? 어차피 자연이란 세월이 흐르면서 움직이거나 사라지기도 하면서 계속 변해가는 거잖아. 물길이 거세어져 돌이 쓰러진다면 그것도 자연이 준 운명인 셈이지.
아이2: 그게 자연에 순응한다는 동양적 생각인가요?
어른: 응. 앞으로 아시아의 다른 건축들을 보면 알겠지만 특히 한국적인 경우에서 더 잘 읽을 수 있단다.
(광풍각에서)
어른: 자~ 우리가 앉아 있는 이 곳은 광풍각이라는 곳이고 저 위로 보이는 건물은 제월당이라고 한단다. 광풍각이 방문객들을 위한 곳이라면 제월당은 주인이 사는 집이야. 이전에 배웠듯 각각의 건물은 규모로 구분할 수 있는데 광풍각은 정면 3칸, 측면 3칸이고 제월당은 정면 3칸에 측면 1칸으로 조금 작아. 둘 다 팔작지붕을 얹었고 온돌바닥을 갖추어 겨울에도 제법 따뜻하게 지낼 수 있게 했지.
아이1: 그럼 여기서 계속 사람이 살았던 건가요?
어른: 그런 건 아니고 이런 곳을 보통 별서라고 하거든? 별서라는 것은 거주 목적의 집 근처에 지은 일종의 별장이나 마찬가지인데 특별히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곳에 위치하는 경우에는 별서라 부른단다. 그러니 출퇴근 하는 일종의 야외 공부방이라고 할 수 있지.
아이2: 하지만 정원이라고 했잖아요? 정원은 나무와 꽃을 가꾸기 위한 곳 아닌가요?
어른: 응. 물론 이 곳에서도 지금 보이듯이 여러가지 나무와 꽃이 한데 어우러져 있고 이 모든 것들은 다 위치와 종류에 따라 제각각의 의미를 담고 있단다. 철학적으로 가꾼 정원이랄까? 그런데 보통 우리는 이 곳을 정원이라고 얘기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소쇄원은 원림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아.
아이1: 원님이요?
어른: 원님이 아니고 원림(園林). 정원이 주택들 가운데 인위적으로 동산의 분위기를 연출한 것이라면 원림은 동산과 숲의 자연 풍경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내부에 정자나 집을 배치한 것을 뜻해. 게다가 정원은 식민지 시대에 일본에서 들여온 개념이라 우리식으로 얘기하자면 원림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단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원림을 만든 사람은 양산보(1503~1557)라는 선비인데 그의 호가 소쇄옹인 까닭에 소쇄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어. 소쇄(瀟灑)는 시원하고 깨끗하다는 뜻이 있거든. 대나무 숲과 개울가에서 나는 소리를 들어보면 잡생각이 사라지고 기분이 절로 상쾌해지지 않니?
아이1: 쿨....
어른: 얘는 너무 편안한지 벌써 잠이 들었네. 하긴 시내에서 꽤 떨어진 곳까지 왔으니 무리도 아니지.
양산보는 너희들보다 조금 더 컸던 열다섯이 되던 해 정암 조광조의 제자로 들어갔어. 조광조는 당시에 곧은 성격과 바른 품성으로 사림들의 지지를 얻고 있었던 학자였거든. 그런데 이를 시기하던 세력이 꾀를 부려서 결국 임금이 하사한 사약을 먹을 수 밖에 없게 되었지. 그때 양산보는 겨우 열일곱 이었는데 스승의 억울한 죽음으로 부터 큰 충격을 받았던 것 같아. 모름지기 사람은 때를 잘 만나지 않으면 그 큰 뜻을 펼치지 못한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속세와 인연을 끊고 고향에 내려와 일찌감치 여생을 보낼 장소를 만들게 된 거란다.
아이2: 그럼 십대 때부터 이런 곳을 만들기 시작한 거에요?
어른: 본격적으로 원림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삼십대였지만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은 이십대부터 그에 대한 꿈을 조금씩 키워갔었던 모양이야. 그리고 평생을 소쇄원에서 공부하는 데 보냈으니까 돈이나 권력에 대한 욕심 없이 참 바람직한 삶을 살다 가신 분이였지.
아이2: 에이. 그래도 이 산 속에서 혼자 있으려면 심심했겠어요.
어른: 그래서 다른 선비들이 자주 찾아와서 공부도 하고 휴식도 취하라고 광풍각이며 대봉대며 마련한 것이 아니겠니? 덕분에 여러 사람들과 친분을 쌓을 수 있었고 이 곳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글귀와 시가 많이 남아 있단다.
아이2: 그래서 이렇게 작은 장소에 대해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거군요?
어른: 대표적으로 양산보의 친척인 김인후라는 사람이 48영 한시를 써서 소쇄원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렸지. 원래는 싯구를 담장에 걸었는데 지금은 제월당에 가면 볼 수 있어.
아이2: 영이 뭐죠? young?
어른: 영(詠)은 노래하다 또는 시를 짓다라는 뜻인데 48영이라고 하면 마흔여덟개의 시를 의미하지.
아이2: 와. 정말 많이도 썼네요.
어른: 응. 그래서 지금 우리가 그때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와 생각들을 짐작하는 자료로 쓰이지.
아이2: 소쇄원에 대해 모르는게 없겠어요.
어른: 하하. 꼭 그렇지만도 않아. 옛부터 우리 조상들은 많은 의미와 철학을 담아서 터전을 만들었거든. 여전히 풀리지 않은 비밀들이 남아 있단다.
아이2: 그게 뭔데요?
어른: 여기 소쇄원도를 보면 개울 남쪽으로 인공 연못이 두개가 있지?
아이2: 예. 하나는 대봉대 옆에 있는 거 아니었어요?
어른: 응. 그런데 그 연못을 수직으로 마주보고 있는 건물은 각각 광풍각과 제월당이거든. 그 연못의 너비와 별당의 바닥 면적이 서로 약속한 듯이 비슷하단다.
아이2: 그게 무슨 의미죠?
어른: 글쎄. 아직 특별한 의미를 찾지는 못했지만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그 위치나 크기가 예사롭지 않게 보이나봐. 언젠가 그 뜻을 헤아릴 날도 오겠지.
아이2: 서양 건축에서 흔히 나타나는 상징성과 스케일이 여기에도 있군요.
어른: 그걸 기억하고 있다니. 정말 똑똑한데? 건축 안에 많은 이야기를 담았다는 사실은 동서양이 다를 바 없어.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그 뜻을 일일이 찾아내고 해석하는 것 보다 이렇게 한가로이 마루에 앉아서 자연과 하나 되길 바랬던 소쇄옹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 우선이지 아닐까? 그러니까 오늘은 그냥 한껏 쉬다가 가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