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ica m6ttl
50mm noctilux f1.0
tmax400
인천도시개발공사 홍보팀과 아주 작은 일을 하게 된 마당에 그들의 작업을 비판하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내가 쏘는 비난의 화살은 어디까지나 일차적으로는 설계자에게 향한다. 그래도 세계도시축전을 한다고 대외적으로 홍보하는 마당에 대표적인 건물로 '투모로우 시티'같은 모작을 자랑하는 것은 좀 부끄러운 감이 없지 않다.
한편으로는 이 건물의 디자인에 내가 과민하게 반응하는 것인지, 아니면 bmw welt를 설계한 쿱 힘멜블라우(coop himmelblau)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디자인을 구입한 것은 아닌지 조심스럽기도 하다. 그래도 bmw welt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경이롭고 상징적인 어휘를 차용한 것은 분명한 것 같고 디자인을 진행한 업체에서는 깊은 반성이 필요하다.
인천 송도의 투모로우시티
투모로우시티의 cg
쿱 힘멜블라우의 bmw welt
bmw의 진취적이고 역동적인 기업 이미지가 그대로 느껴진다
올해 유난히 유명 인사들의 부고가 잦다는 것은 나의 기분 탓인가?
더군다나 이들 모두 천수를 누리다 간 것이 아니라 자의든 타의든 어느 날 갑자기 덜컥.
사실 산다는 것이 다 그렇다. 본인의 의지로 태어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듯이 생의 마지막 날을 살고 가는 것 또한 주어지는 운명인 법. 옛날에는 죽는다는 것이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다. 내가 아무런 의식도 가지지 못한 채 수 십, 수 백년도 아니고 수 억, 수 조의 시간을(사실 끝은 없겠지만) 無의 세계에서 꼼짝 못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공포의 이유였다. 그래서 차라리 뜨거운 불구덩이에서 버터플라이를 해도 좋으니 지옥과 같은 사후 세계가 제발 있었으면 하고 바램도 가져봤다.
요즘은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몸이 많이 아프기도 하고 그래서 내 뜻대로 사는 것 자체가 어렵다 보니 생에 대한 집착 혹은 미련이 예전에 비해 훨씬 덜해졌다. 어짜피 통증을 달고 평생을 사느니 그냥 영원히 잠 드는 것이 나을 수도 있고 이제껏 이렇다 할 정도로 쌓아둔 재산도 업적도 없다보니 적어도 현생에 대한 미련 같은 것은 남들보다 덜하겠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런 건방진 생각은 내가 만일 한 달 정도만 살게 된다면 어떤 방식으로 나 자신의 운명을 위로할 수 있을까 해서 가급적 최대한 미화한 것이고 실제로는 아직 죽고 싶은 마음도 없고 누가 죽여버리겠다고 하면 언제 아팠냐는 듯 전력 질주로 도망칠 사람이 지금의 나란 놈이다. 더군다나 부모님 두 분 멀쩡히 계신데 어디 자식된 도리로 불효를 작정하겠는가. 그냥 죽음이란 것이 예전처럼 그렇게 '죽'자만 나와도 거품 물고 까무라치는 정도의 무서운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더군다나 자연의 섭리란 참으로 친절하게도 매일 같이 탄생과 죽음의 경험을 제공하지 않는가.
모두 죽을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기에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어짜피 죽으면 살아 남은 자들은 몰라도 정작 본인은 과거가 알게 뭐야가 될 터이니 죽어서 억울 할 일은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여전히 개똥밭을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으니 괜한 오해일랑 하지들 마시고...
전혀 관계 없는 얘기였지만,
조오련 아저씨의 명복을 빈다.
아저씨는 부디 천국에서 버터플라이를 하시기를.
지난 봄날, 길어진 머리를 자르러 미장원을 가는 길이었다.
직장에 귀속되지 않은 사람에게 평일 오후 시간이란 뻥 뚫린 도로를 질주하는 버스에 혼자 앉아 있는 것 마냥 사치스러운 순간이다.(이에 비해 휴가를 떠나는 회사원이란 꽉 막힌 도로의 버스전용차로를 달리는 짜릿한 기분이겠지) 기다림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신속한 과정을 예상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보도를 걷고 있을 무렵 두세 발짝 앞에서 왠지 모르게 멈춰서 있는 어린 소녀를 발견하였다. 가방을 어깨에 매고 단정하게 차려 입은 소녀는 요즘 아이답게 곱고 새치름한 얼굴이었다.
무엇 때문에 가던 길을 멈추고 있을까.
미동도 않던 소녀의 눈은 발 밑의 보도 블록에 초점이 고정되어 있었고 나도 호기심에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그녀의 눈길을 따라 시선을 바닥에 던져놓았다. 저런. 소녀의 발 앞에는 방사능이나 태양풍에 노출된 것처럼 비정상적으로 퉁퉁한 개미 한 마리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 나도 소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것은 개미 라기엔 너무 큰 놈이었다. 울룩불룩 단단한 몸은 아령을 닮았고 몇 미리에 불과한 보폭은 심히 무거워 보였다. 좀 더 구체적인 상상이 가능하도록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최홍만 개미였다.
어려서부터 개미집에 물을 흘려 넣어 개미들이 살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던 모습을 즐기고 개미가 물면 얼마나 아플지 체험해 보기 위해 가급적 병정개미들을 찾곤 했던 경험들을 되짚어 보더라도 이만한 크기의 개미는 처음이다. 아이 역시 처음 접하는 크기에 놀라 숨죽이고 있었겠구나 어렵지 않게 이해한 순간 소녀는 조용히 한쪽 발을 들기 시작했다. 가던 길을 고수하던 개미는 어느덧 소녀의 발이 있던 곳까지 이동해왔고. 어. 어?! 설마 그런 거였어? 그래서 멈춰있던 거였어? 그리고는 차마 말릴 수도 없을 만큼 그녀의 반응은 나의 깨달음의 속도를 능가하였다.
쿵.
발이 강하게 지면을 차는 소리가 났고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은 그렇게 끝이 났다. 개미에게는 미처 반항할 틈도 허락되지 않았다. 소녀는 다시 발을 들어 최홍만 개미의 처참한 흔적을 확인하였고 나는 차마 그 장면을 똑바로 보고 싶지 않아 눈을 돌렸다. 바닥이나 아이의 신발 밑창에 납작하게 깔려 있을 개미 한 마리의 죽음이 비참해서가 아니다. 방금 전 까지도 살아 꿈틀대던 생명체를 의도적으로 죽인 아이의 잔인함과 목적을 달성한 뒤 얼굴에 퍼지는 행복감에서 다시 한 번 성악설의 손을 들어줄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앞서 잠깐 언급했던 나의 어린 시절도 더 하면 더 했지 소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금은 공포의 대상인 곤충들이 그 땐 살아 있는 노리개였고 파브르의 곤충기를 열심히 읽었지만 저자가 진정 말하고자 했던 바는 시신경을 타고 뇌에 도달하기 전에 증발해 버렸다. 순수 악으로 가득 찬 소년에게 정성스레 그려진 곤충들의 삽화는 어느 근사한 식당 메뉴판처럼 한 끼 포만감을 위한 친절한 매뉴얼 쯤에 불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