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심하기엔 너무 높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 |

블루투스를 이용해 핸드폰 사진을 아이맥에 손 쉽게 전송하게되니 라이카가 없어도 이렇게 순간 순간 사진을 남기게 되더라. 그동안 핸드폰 카메라에 완전 무관심이었는데 새로운 재미를 느끼고 있다. 어제는 바보같이 네이트온 무료문자 서비스가 맥에서도 되는 걸 알고 어찌나 신났던지. 2000년에 발매된 앨범을 찾기 위해 상당한 시간을 보내는 것도 그렇고 하여튼 뒷북치는 건 예나 지금이나 어쩔 수 없는 운명인가보다.

photo by LG cyon su-910
2002년 회사생활을 할 당시 오드뮤직 사이트에서 범수형이 소개한 마키하라 노리유키의 '태양' 앨범을 듣고 홀딱 빠졌던 적이 있다. 왜색이 진하게 풍기고 가사도 모르지만 진심이 전달되는 느낌이 좋았다. 게다가 앨범 자켓의 저 심플함이라니!
그 땐 어디서 어떻게 앨범을 구했는지 오리무중인데 지금은 인터넷 어딜 뒤져봐도 구입도 다운도 어려운 형편이다.
혹시...정말 혹시나 이 앨범을 소장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알죠?

bk!형의 소개글

정 안 되면 범수형한테 '리핑한 mp3파일 좀 주세요'라고 해야 하는데 엄격하신 형인지라 혼날 것 같기도 하다. 그 땐 형이 astro bits로 활동할 때 냈던 앨범을 내밀며 좀 봐달라고 뒷통수를 긁적여야겠다.


3시 50분 한양대역 갔다가 5시 30분에 교대역으로.
버는 것은 정말로 쥐꼬리인데 병원비 지출은 블록버스터여서 오늘도 따꿈이 가계부를 쓰다가 울적해졌다.
아직 받아야 할 돈들이 있다지만 어쨌든 생각지도 못한 지출들로 잔고는 이번 달 부터 마이너스로.
통장도 자석같으면 얼마나 좋을까.
마이너스 통장이 생기면 어느새 잔금이 가득한 통장이 척~허니 달라붙는.
게다가 잔병치레가 많은 사람이 오래 산다고 하는 데.
잔병, 중병 골고루, 머리부터 발 끝까지 핫 이슈인 나는 얼마나 살지 두고 봅시다.
전쟁의 상처를 극복하고 증가하는 주택 수요에 안정적으로 대처하게 된 80년대부터는 주거 환경의 양적 성장을 떠나 질적 향상을 이룰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게 되었다. 결국 공간적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건축을 건설과 문화의 중간 영역으로 인식하는 관점의 변화를 바탕으로 공간의 물리적 측면뿐만 아니라 경제, 환경, 사회, 문화적 가치를 동시에 생각하는 통합적인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네덜란드의 물리적 환경을 다루는 정책 문건인 국토공간계획(Nota)과는 별도로 마련된 건축 정책에 대해 소개하며 건축 센터가 밀집해 있는 로테르담의 예를 통해 정책을 실천하는 보조 기구들과 민간 부분의 현황을 알리고자 한다. 이로써 네덜란드의 건축이 세계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배경을 정책적인 측면에서 이해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중앙 정부의 정책과 관련 기관
건축 정책
네덜란드는 1990년대 초부터 공간적 품질 향상을 목표로 자치적인 건축 정책을 수립하였는데 핵심적 내용은 다음과 같다. 최초의 정부 주도 건축 정책은 1991년에 발표한 '건축을 위한 공간(space for architecture)'에서 출발한다. 이 문서는 교육문화과학부(OCW)와 주택공간계획환경부(VROM)의 승인을 받아 네덜란드건축협회(NAi), 지역건축센터, 건축장려기금 등을 잇따라 설립하는 근거가 되었다. 두번째 정책은 1996년에 수립된 '공간의 건축(architecture of space)'으로서 정책이 다루는 범위를 도시개발, 조경, 사회기반시설, 민간 영역으로 광범위하게 확장시켰다. OCW와 VROM와 함께 추가적으로 농림식품부(LNV)와 교통수자원부(V&W)의 승인이 이루어졌다. 세번째 정책 문서 '네덜란드 구성하기(shaping the netherlands)'는 2001부터 2004년 까지 유효한 것으로서 건축적, 공간적 품질을 증진시키는 것을 목표로 다양한 스케일을 갖는 열 가지 주요 사업에 관한 토대를 마련하였다. 이를 승인하는 기관으로 OCW, VROM, LNV, V&W에 경제부(EZ)가 추가되었으며 각각의 부처는 적어도 하나의 사업을 채택하였다. 또한 국가건축가협회는 수준 높은 품질을 보장하고 사업 초기부터 디자인 연구가 병행되도록 보조하였다. 2005년부터 2008년을 바라보며 작성한 최근의 문건은 '공간 계획과 문화에 관한 실천 계획(action program on spatial planning and culture)'으로서 문화, 역사, 건축, 도시, 조경의 서로 다른 분야간의 협력을 이끌어내고 지방 정부와 민간 부분이 통합된 계획을 수립해 나갈 수 있도록 지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4차 정책에서는 3차 때의 사업들을 모범삼아 정부의 역할, 진행 단계, 규모, 디자인 면에서 다양하게 분화되었으며 그 구체적인 내용들은 다음과 같다.
· the new rijksmuseum: 역사적으로 중요한 건물의 리노베이션
· the new holland water line: 오래된 방어기지의 보존과 개발
· design of motorway routes and their surroundings: 도로와 그 주변 환경의 질적 향상
· business park architecture: 배치, 조경, 건물의 품질을 촉진
· improvement of professional commissioning practices: 새로운 사업에서 공간적 품질을 촉진
· embassy buildings: 네덜란드를 상징하는 건축/실내 디자인
· change of function of sites and structures formerly used for defence purpose: 방어기지의 재생
· afsluitdijk: Zuiderzee를 막는 토목 공사의 75주년     
· limes: 로마제국 국경을 강조하는 디자인 모색
· design in the green heart: 란스타트 중심 녹지 디자인
· post-war district: 문화적 측면을 강조한 도시 재개발
· water as element in spatial design: 디자인에 친수 요소 도입
· world heritage: 세계문화유산의 보존과 개발

1. VROM에서 발행한 4차 국토공간계획(Nota)로서 신도시 개발을 향한 초석을 마련하였다.
2. 5차 국토공간계획. Nota Ruimte라고도 하며 2020년까지의 계획을 담고 있다.

VROM, OCW

VROM(주택공간계획환경부)는 주택 공급과 주거 환경 개발에 관한 모든 정책을 수립하는 부처로서 세대를 거듭하여 지속될 수 있는 환경 조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1960년부터 대략 10년에 한 번꼴로 발행하는 Nota(공간 계획에 관한 메모)는 다가올 미래에 대한 사회, 경제, 환경적 변화를 예측하고 이에 대응해 국토 개발 계획이 갖추어야 할 지향점을 제시하는 정책 문건이다. 유럽에서 손꼽히는 인구밀도를 자랑하는 네덜란드가 앞으로도 일관성 있고 살기 좋은 환경을 구축하는데 있어 신뢰할 수 있는 지침이 되고 있다. OCW(교육문화과학부)는 교육과 문화 활동을 지원하고 정책을 수립하는 기관으로서 건축의 문화적 기능이 강조되는 근래에 들어 더욱 그 영향력이 증가하고 있다.
     
Rijksgebouwdienst
공공시설관리국에 해당하는 Rijksgebouwdienst는 헤이그에 위치한 VROM에 속해 있으며 정부의 각 부처들이 맡은 바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쾌적한 업무 환경을 제공하는데 일차적인 목적을 갖는다. 정부 청사, 국책 연구소, 고대 유적, 고성, 감옥, 박물관 등 총 11만 명을 위한 2,000여 건물을 책임지고 있기 때문에 네덜란드에서 가장 큰 부동산 회사 중 하나인 셈이다. 이 공공시설관리국의 수장이 Rijksbouwmeester(국가건축가)로서 건축, 건설, 건축 유산, 인프라, 건축 정책, 시각 예술 전반에 걸쳐 중앙 정부의 자문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2006년을 기해 200주년을 맞이하며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국가건축가 제도는 왕권의 성립과 동시에 활약한 왕립건축가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직접 디자인을 수행하던 관습에서 벗어나 국가핵심공공사업에 대해 적절한 건축가를 지명하고 독립적인 자문 위원으로서 활동하는 현대적 기능은 1950년대 말부터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최대 5년의 임기를 갖는 국가건축가는 jo coenen과 mels crouwel을 거쳐 2008년부터 liesbeth van der pol이 직책을 맡고 있다. 

BNA (Bouwkunst Bond van Nederlandse Architecten)
왕립건축가협회인 BNA는 건축가의 실무 역량을 증진시키고 건축계 전반의 발전을 도모하는 전문 기관으로서 '건축 발전을 위한 모임'(1842)과 베를라헤가 선두 지휘를 했던 '네덜란드 건축연합'(1908)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이후 1919년에 두 단체가 병합하고 1957년 왕실의 인증을 받는 과정을 거쳐 현재의 조직 구성을 갖추게 되었다. 총 1,500개 건축 사무소의 3,000여명에 달하는 인력이 BNA의 회원으로 등록되었으며 네덜란드에서 이루어지는 사업의 75%가 협회와 직접 관계될 정도로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건축사협회 SBA(Stichting Bureau Architectenregister)인증을 받은 건축사는 BNA의 회원으로 등록되며 전문 직업인으로서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한 협회의 다각적인 활동들은 다음과 같다.
· BNA Blad라는 월간지를 발행하여 회원들이 전문 직업인으로서 발돋움하기 위한 최신의 정보를 제공한다.
· 교육 과정과 회의에 관한 정보를 통해 회원들이 전문가로서 꾸준한 성장을 할 수 있도록 보조한다.
· 자체적 세미나와 워크샵을 구성한다.
· 건축가와 건축주 사이의 계약 관계를 위한 법적 기준(DNR)을 제시한다.
· 정부와 주요 건축 사무소간의 관계를 유지한다.
· 해외 전문 인력과의 관계를 유지한다.
· 집단의 노동 협약을 이끌어 내는데 있어 고용주와 피고용인을 동시에 대변한다.
· 건축주가 건축가를 선정하는데 있어 자문 역할을 한다.
또한 건물의 완공여부에 관계없이 건축의 질적 향상에 기여한 건축가 혹은 비건축인에게 BNA Kubus 상을 수상하며, 2006년부터 매년 6개 광역 자치구에서 우수 건축을 선정해 올해의 건축 상을 수여한다. 매년 6월 말, 하루나 이틀에 걸쳐 평소에 접근이 어려웠던 민간 건물들을 일반에게 가이드 투어 형식으로 공개하는 건축의 날 프로그램 또한 BNA가 주최하는 주요 행사이며 이를 통해 건축 문화가 지역 사회의 관심을 얻고 단단한 결속을 이룰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NAi
20여년의 역사를 갖는 네덜란드건축협회 NAi(the Netherlands Architecture institute)가 로테르담의 미술관이 집결한 뮤지엄파크에 자리잡게 된 것은 1993년도 부터이다. NAi는 협회장을 필두로 자료 수집, 전시, 사무, 대외 업무, 재정부을 갖추고 있으며, 특히 건축 담론을 형성하는 연구소이자 건축, 도시, 조경, 실내건축에 관한 전시를 매년 20회 이상 기획하는 전시장의 역할이 두드러진다. 1800년 이후 현저한 활동을 보였던 네덜란드 건축가들에 관한 거의 모든 시각 자료들을 보관하고 있으며 도서관에 비치된 35,000권의 도서들은 누구든 자유롭게 펼쳐볼 수 있도록 개방적이다. 전문 건축인 뿐만 아니라 대중들에게도 건축에 대한 정보를 알리고 흥미를 자극하기 위해
강의, 좌담, 출판, 답사, 교육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으며 이는 건축이 모두의 참여를 필요로 하는 문화적 활동이라는 것을 반증한다. 이렇게 생산된 양질의 컨텐츠들은 출판물을 통해 재생산되며, 로비에 위치한 서점에서는 전시 주제와 관련된 서적들을 판매하여 다양한 종류의 자료들을 매개한다. archis, AMO, 콜럼비아 대학원 개발보존학과의 협업으로 발행되는 volume지의 편집장을 맡는 동안 국제 정치, 사회적 이슈에 관한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내고 성찰적 태도를 피력했던 Ole Bouman이 2007년부터 새로운 협회장으로 위촉되었으며 VROM, OCW, 외무부, 경제부의 정부 단체와 여러 민간 사업단이 이들의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VVV

관광안내소인 VVV는 건축과 직접적인 관련을 갖고 있는 조직은 아니지만 방문자가 도시를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다양한 정보를 제공한다. 모든 도시에 적어도 하나의 VVV가 상주해 있으며 주로 기차역과 같은 교통의 결절점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견고한 하나의 단위로 구성되기 보다는 각 도시의 특성과 이벤트에 따라 외부 프로그램과 결합되기 때문에 일종의 도시 전시장, 건축 센터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세계적 명성을 자랑하는 건축가들의 작업이 전 국토에 걸쳐 산재해 있는 네덜란드에서 VVV의 존재는 필수적이다.  

Architectuur Lokaal
제1차 정부 주도 건축정책인 '건축을 위한 공간(Space for Architecture)'의 결과로 1993년에 설립되었으며 지역 정부의 건축 관련 업무를 보조하고 지역 정책을 수립하는 관계 당국들을 위한 자문 역할을 담당한다. 또한 국내외를 불문하고 건축 관련 이해 당사자들 간의 직접적인 협의를 이끌어내며 개별 건축주 포함 건설 시장과 건축가 사이에서 문화적 교류를 주도함으로써 지역 사회와의 원만한 소통을 도모한다. 이들의 활동은 VROM과 OCW로부터 받는 40만 유로의 재정 지원을 통해 이루어지며 이를 통해 매해 평균 100만 유로에 이르는 시장을 창출하게 된다.

Nirov
헤이그에 본사를 둔 Nirov는 주택과 계획 분야의 전문성을 위해 결성된 지식 센터이다. 도시와 지역 개발에 대한 전문가 만 여명을 구성원으로 두고 있으며 이들 간의 업무상 교류를 활발하게 지원하고 있다. 또한 각종 회의, 토론회, 답사, 기행 등 매년 120여 가지의 활동을 조직하여 전문 지식 전달과 최신 정보 공유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주택과 도시 개발에 관한 이슈를 다루는 대표적인 잡지 3개(S&RO, Tijdschrift voor de Volkshuisvesting, Nova Terra)를 발행하고 있으며 네덜란드의 미래에 관한 전망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는 지리정보시스템을 구축하여 서비스 하고 있다.

Stimuleringsfonds voor Architectuur, BKVB, Europan, Archiprix
Stimuleringsfonds voor Architectuur는 건축, 도시계획, 조경, 실내건축 분야에서 우수한 성과를 나타낸 연구, 출판, 실무에 대해 네덜란드 정부에서 제공하는 기금이다. 크게는 건축, Belvedere(문화, 역사 관련), HGIS(해외 프로젝트) 세 분야로 구분되며 지원자의 국적에 관계없이 매년 4차례의 응모 기회가 주어진다. 건축이 사회에 미치는 다양한 영향들을 분석하고 생산적인 논의를 도출하기 위해 건물 완공에 관련된 자금을 지원하기 보다는 주로 학문적 개발, 지식 교환, 문화 역사적 해석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보다 넓은 의미에서는 건축 전반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확장시키는데 그 목적을 둔다. OCW, VROM, LNV, Bu Za(외무부)로 부터 기금 조성을 지원받으나 모든 결정은 독립적으로 행사하고 있다. 주로 출판물에 대한 협조가 두드러지며 Far Max를 비롯한 다수의 디자인, 리서치 관련 서적들이 이 기관의 도움을 받아 출판되었다.
BKVB는 시각 예술, 디자인, 건축 분야에 대한 재정 지원을 담당하며 예술가, 디자이너, 건축가 또는 문화, 예술을 중재하는 모든 사람들을 그 대상에 포함시킨다. 이들의 작업, 연구, 출판, 전시는 물론이며 해외 유학, 해외 체류, 여행과 같은 부수적 활동까지도 폭넓게 지원하는 프로그램들을 갖추고 있다. 다만 학교 졸업 후 4년 이내의 젊은 건축가, 네덜란드 거주증을 소지한 자에 한해 지원이 가능하며 지원서는 반드시 네덜란드어로 작성해야 하는 규정이 있다.
'유럽의 도시성'에 대한 젊은 건축가들의 진지하고 창의적인 사고를 탐색하는 Europan은 70년대 프랑스에서 건축가의 혁신과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제정한 프로그램 PAN(Programme d'Architecture Nouvelle)에 최초의 기원을 두고 있다. 이러한 방식은 80년대 전 유럽에 걸쳐 뿌리를 내려 현재는 2년에 한번씩 20여개국에서 동시에 이루어지는 대대적인 설계 경기로 발전하였다. 40세 미만의 젊은 건축, 도시계획가들을 대상으로 모두 동일한 조건아래 공모가 진행되며 1등을 한 팀에 대해서는 건물을 실제로 지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에 각 국의 위원회에 의해 제시된 대지에는 보다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해법이 요구된다. 네덜란드는 1988년부터 유로판 연합에 가입하게 되었으며 OCW와 VROM으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고 있다.
Archiprix는 대학 이상의 고등 교육 기관을 졸업하는 학생을 대상으로 매년 열리는 설계 경기로서 건축, 도시, 조경 디자인 관련 학교의 졸업 작품이 출품 되는 만큼 그 다양성을 가장 큰 특징으로 삼는다. 또한 이를 통해 디자인 교육의 질을 높이고 우수한 학생들이 국내외로 활동 영역을 넓힐 수 있도록 돕는 계기를 마련한다. 설계사무소, 보험사, 시행사 등 민간 사업자들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는 시스템 또한 주목할 사항이다.

로테르담의 지방 자치 단체와 활동들
CIC, AIR
CIC(City Information Center)는 관광객을 위한 VVV의 역할을 공유하기도 하지만 엄밀히 보자면 로테르담 시민들을 위한 도시 정보들을 다루는 곳이다. 시민 활동의 중심지에 위치하여 뛰어난 접근성을 자랑하는 정보 센터는 거대한 도시 모형을 통해 방문자들이 로테르담의 미래를 한 눈에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현재는 2040년까지 있을 Randstad(환경 보호를 위해 네덜란드 중심에 형성된 거대 녹지 green heart 주위를 둘러싼 중심도시들: 암스테르담, 로테르담, 헤이그, 위트레흐트가 대표적) 발전 계획에 대한 전시가 VROM의 주최로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정기적으로 10월에 개최하는 Bouwputtenfestival 행사를 통해 현재 진행중인 대규모 개발 현장을 홍보하여 시민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개발 이슈를 공론화 시키는데 앞장서고 있다.
로테르담 건축 정보 센터인 AIR는 로테르담과 주변 광역 도시 내에서 활동하는 건축, 도시계획, 조경가들의 공공적이고 전문적인 소통을 도모한다. BNA가 '건축의 날' 행사를 진행할 때 로테르담에서는 AIR와의 연계가 필수적이다. 또한 문화, 역사적으로 가치 있는 기념비적 건물들을 선정해 일반인을 대상으로 가이드 투어를 기획한 '모뉴먼트 데이'를 실천하는 단체이기도 하다. CIC가 로테르담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 전달과 도시의 발전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AIR는 건축의 디자인과 문화 역사적 의미를 되짚어보는데 그 목적을 둔다. 로테르담 내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건축 행사에 관여하며 젊은 건축가들이 실무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그들의 작업을 대신 선전해주는 Maak을 발행한다.

IABR
IABR(International Architecture Biennale Rotterdam)은 2001년에 설립된 기관으로 건축은 모두의 관심이어야 한다는 확고한 믿음 하에 건축과 도시에 관한 연구 결과의 공유를 목적으로 한다. 특정 도시 상황과 관계된 긴급한 사회적 이슈를 파헤치고 이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는 메인 전시를 중심으로 회의, 강의, 워크샵 등의 활발하게 전개되는 부수적 활동들이 주제의식을 보강하는 형태를 띄고 있다. 이를 통해 네덜란드가 처한 현실을 국제적 맥락에 대입해 보기도 하고 범지구적 문화와 국부적 환경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약 4개월에 걸쳐 진행되는 행사는 디자이너, 교수, 학생, 정치가, 부동산 개발 주체와 투자자를 아우르며 이러한 참여가 사회단체를 넘어 모든 시민들의 일상으로 확장되기에 충분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2003년부터 열린 비엔날레는 각각 '이동성', '홍수', '권력' 등에 대한 주제를 다루었으며 2009년에는 로테르담에 본사를 둔 국제적 설계 사무소 KCAP의 설립자인 Kees Christiaanse를 큐레이터로 임명해 '열린 도시'에 대한 다양한 이슈와 가능성을 다룰 예정이다. 2회, 3회 비엔날레에서는 베를라헤 인스티튜트의 역할이 컸지만 4회에는 큐레이터가 학장을 맡고 있는 스위스 에테하(ETH) 도시설계학과의 적극적인 참여가 기대된다.

로테르담 2007: 건축의 도시
도시의 국내외적 위상을 높이고 관광객을 적극적으로 유치하고자 하는 시 정부의 의지는 매년 하나의 주제를 설정해 로테르담이 기존에 갖고 있던 유무형의 자산을 홍보하고 향후 발전될 가능성을 찾아보는 시도로 이어졌다. 2000년을 시작으로 6회째를 맞이하는 행사는 유럽연합, 문화수도, 친수환경, 스포츠, 친환경 등의 주제를 선보였는데 2007년에는 특별하게 100년의 역사를 갖는 로테르담의 근현대 건축을 부각시키는 해였다. 프로그램 기획과 재정 후원을 모집하는 OBR(Ontwikkelingsbedrijf Rotterdam)에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일반 시민들과 건축 관계자들의 관심과 소통을 이끌어냈는데 40개의 우수 건물을 선정해 도시 전체를 지붕 없는 전시장으로 만든 것이 대표적이다. 각각의 건물은 멀리서도 인식될 수 있도록 보라색 시트지로 입면을 장식하였으며 개인이 자발적으로 투어를 추진할 수 있도록 건물에 대한 설명을 오디오 파일로 만들어 공개하였다. 그 밖에 쾌속정과 자전거를 이용한 공식 가이드 투어가 제공되었으며 NAi에서는 르 꼬르뷔지에의 건축을 재조명하는 대규모 회고전을, 쿤스트할에서는 건축 비엔날레를 개최해 도시 전체에서 흥미로운 행사가 끊이지 않았다.     

민간 사업 부분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폭격으로 한순간에 폐허로 변한 로테르담은 전후 주택 재건을 위해 조립식 주택을 실험할 수 있는 터전을 제공하였고, tabula rasa 상태에서 시작된 개발은 주변 맥락을 고려할 필요를 덜어 현대 건축이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유럽 최대의 내항이었던 로테르담 항구가 북해를 매립한 땅으로 이전함으로써 비워진 대지는 오피스와 고층 주거들이 밀집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였으며 이러한 흐름에 발맞추어 하나 둘 씩 자리잡은 회사들이 국제적인 명성을 얻으며 성장할 수 있는 동력이 되었다. 따라서 로테르담이 현대 건축의 전시장이자 담론 형성의 진원지가 될 수 있었던 배경으로 중앙/지방 정부의 정책적 지원 외에도 OMA, West8, MVRDV, Neutelings Riedijk, KCAP로 대표되는 주요 건축 회사들의 네트워크 또한 주목해야 한다. 민간 부분에서 축적한 다양한 노하우와 고등 교육기관에서 시도하는 실험적이고 깊이 있는 연구가 서로를 자극하면서 시너지를 창출하고, 010과 같은 건축 전문 출판사가 이들의 컨텐츠를 확대 재생산 하는 전략도 비공식적인 민관협력관계로 해석할 수 있다. 렘 콜하스는 그의 책 S.M.L.XL에서 80년대의 로테르담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로테르담은 아무런 수요도 창출하지 않는 도시이다. 다른 유럽의 평범한 전후 재건 도시와 같이 황량하고 특징이 없으며 역사, 자부심, 흥미, 유혹 등이 존재하지 않는다.' 도시적 매력이 부족한 까닭에 그런 걸 즐길 여유가 없는 건축가들에게는 사무소를 설립할 최적의 장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건축이 상품화되어 관광객을 불러 모으고 아이들은 교육과 놀이를 통해 건축을 익숙하게 바라본다. 건축 센터에서는 전시, 회의를 유치하며 학교에서는 공개 특강을 통해 정치, 경제, 환경과 같은 국제적인 이슈에 대해 고민한다. TV에서는 행정가와 건축가가 출연해 지역의 새로운 개발 계획과 공사 현장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시청에서는 시민들의 공론을 수렴하는데 적극적이다. 국가 주도의 건축 정책을 필두로 하여 이렇게 지방 정부와 민간 부분이 다양한 층위로 개입되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으며 이러한 관계가 얼마나 입체적이고 튼튼하게 조직화되었는지에 따라 정부에서 수립한 정책의 성공 여부가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공습 전의 로테르담

독일 군의 공습 후 폐허가 된 로테르담    

로테르담의 건축 네트워크

참고서적
1. action program on spatial planning and culture, architecture and belvedere policy 2005-2008
2.the chief government architect and the policy on architecture/atelier rijksbouwmeester 출판
3. constructing the netherlands/marc a. visser 저/thoth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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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건축사협회에서 발행하는 건축사에 기고했던 글이다.
원고료도 못 받는 일이란 걸 알고도 정말 열심히 썼는데 편집 과정에서 대폭 생략되고 심지어 마지막 사진은 다른 걸로 대체된 것을 보고 무척 기운이 빠졌었다.
어제 눈이 왔는지는 잘 모르겠고 피로는 가득 쌓인 것이 분명한 관계로 하루 종일 집에서 쉬면서 2004년에 작성했던 그림 일기들과 자기 소개를 채워 넣었습니다. 혹시나 블로그 주인의 지난 삶이 궁금한 사람들은 category_연재_일상 메뉴로 가셔서 2003년과 2004년으로 워프하시고 notice메뉴를 클릭하여 활동 내역을 확인 해 주십시요.
남은 2009년과 다가오는 2010년에도 잘 부탁 드립니다.
경기대 건축 대학원에서 현대 건축 강의를 하는 연경이 에게서 네덜란드 도시와 건축에 대한 특강 제의를 받은 것이 벌써 몇 달 전이었던 것 같은데... 내가 스스로 쏜 화살은 예외 없이 어느덧 11월 달력의 20일자 네모 칸에 정확히 꽂히고 말았다. 그 때는 그냥 뭐 어깨 너머로 배우고 답사 다니면서 본 걸 허심탄회하게 얘기하면 되겠지 하는 마음에 흔쾌히 승낙을 했는데 막상 강의 준비를 하다보니 해야 할 일이 너무 많고 다시 읽어봐야 될 텍스트들도 산더미라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버렸다. 특히나 파워포인트에 들어 갈 이미지들을 찾기 위해 책을 뒤적거리거나 인터넷을 샅샅히 뒤져야 하는 일은 상당히 고역이었다. 한 번 강의에도 이렇게 고생을 하는데 매 주 강의를 하는 사람의 입장은 어떨까. 물론 이렇게 크게 한 번 고생하면 파편으로만 떠 돌던 식견들이 하나 둘 씩 모여 매끄러운 이야기가 되는 값진 결과를 낳겠지만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은 큰 보상도 없이 그만큼 자신의 에너지를 던져주는 일인 만큼 너그러움과 희생정신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한 때 박사 과정을 밟으려고 이리 저리 알아보던 때가 있었는데 결국 작가의 길을 택한 것이 사회적 시선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나 개인적으로는 무척이나 잘한 결정임을 다시금 확인하게 되었다.

p.s. 정말 완벽하게 내가 보여주고 싶은 것들을 준비한다면 파워포인트 슬라이드 200장으로도 부족하겠지만 욕심을 버리고 90장 가까이 만들었는데 그러다보니 왜 강의에는 교재가 필요한지 몸소 실감하였다. 나에게 서양건축사를 가르쳤던 김영훈 교수님은 한 학기동안 700장의 슬라이드를 준비했는데 물론 그것들이 여러 학교에서 수년에 걸쳐 사용될 자료들이지만 뼈빠지게 준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강의실 불만 끄면 바로 꼬꾸라져 잠을 쳐 잤던 철 없던 제자여서 참으로 죄송한 마음이다.
20일에 있을 경기대 강의 준비로 내일부터 목요일까지 열심히 머리를 쥐어 뜯어야 할 것 같고,
그 뒤로 주말 세미나와 오영욱 강사님을 대신한 연대 강의가 있으나 크게 부담가질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대리 출석은 대출이라고 한다면, 강사의 사정으로 뛰게 될 대리 강의는 대강인가요?
그래서 그까이거 대강 대강 하면 되는 건가요? (와. 돌 날아온다.)
그래도 이미 오래전에 한 약속을 지키러 신종 플루 바이러스가 창궐한 학교에 과감히 들어갑니다.
바이오해저드의 '라쿤시티'나 '피안도'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목숨 걸고 가니까 어설픈 강의에도 듣는 척은 해 주세요. 참고로 건강이 염려되어 공짜 네덜란드 행도 결국 취소했는데 저랑 같이 가기로 했던 한국 직원분께서는 거기서 신종 플루에 걸려 죽도록 앓다 왔다고 하시더군요. 제가 함께 갔다면 아마도 이준 열사처럼 헤이그에 뼈를 묻는 한국인이 되었을 수도 있었겠죠. 참 무서운 세상입니다 그려.

이것 저것 예정된 스케줄을 소화하고 나면 완전히 저만의 시간들을 가질 수 있는 연말이 됩니다. (언젠 아니었냐마는...) 아이들을 위한 건축책 원고를 꼭 작성하고 싶고, 그 동안 읽고 싶었으나 전공 서적에 밀려 차마 책장을 펼칠 수 없었던 소설, 에세이, 교양서 등을 게걸스럽게 해치우고 싶네요. 파스타 관련 서적도 하나 마련해서 맛난 파스타도 집에서 해 먹고 하드에 저장된 고전 영화들(메트로폴리스, 가위손, 시계태엽오렌지)도 이번 기회에 차분하게 감상할렵니다. 아! 얼마전에 산 korg사의 pad kontrol 메뉴얼도 읽어보고 눈이 내리면 사진도 좀 찍어보고 일찌감치 캐롤도 들으면서 연말 기분 좀 내야겠네요.

이렇게나 여러가지 일들과 볼 거리들로 완벽하게 빈 틈을 막았다고 생각했는데 계속 차오르는 적적함은 대관절 어디로 들어오는 건가요?
학교에서 일만 하기 때문에 바깥 세상의 변화를 뒤늦게 알아챈 것일까. h양의 블라우스는 희대의 듀오들 처럼 다이나믹하게 찾아오는 기온 저하와 강한 바람에 속수무책으로 보였다. 반대로 목까지 올라오는 점퍼에 모자와 마스크까지 겸비한 나는 그것도 모자랄까봐 안에 후드 점퍼까지 껴 입고 있었기에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군대 깔깔이처럼 누벼 생각보다 따뜻한 외투를 벗어주고 싶었지만 남자 친구도 아닌게 괜히 오버하는 것 같기도 했고 신경써서 세팅한 그녀의 패션에 누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적당히 아무 까페나 들어가도 됐을텐데 h양은 예의 그렇듯 고집스럽게 마음 속에 점 찍어 놓은 그 곳을 찾아 좌회전, 우회전을 반복하며 압구정 골목들을 헤집고 다녔고 그러면서도 내 기분을 상하게 하지는 않을까 걱정스런 눈빛이었다. 내가 14년 전 그 동네에서 재수할 때만 해도 웬만한 골목과 상점들을 꿰 차고 있었는데 너무도 오랜만에 찾은 로데오 밤 거리는 낯설음과 신기함 그 자체였다. 어느덧 도산공원의 영역에 들어서자 h양은 이제야 알 것 같다며 발걸음을 재촉했고 대체 얼마나 좋은 카페이길래 이 추위를 무릅쓰고 나를 데려가고 싶어하는 것일까 기대감은 커져만 갔다.

"바로 여기야."

눈 앞에 보이는 꽃 집을 보고 설마 여긴가 싶은 찰나. 그녀는 바로 코너를 돌아 근린생활시설 입구 문을 열고 2층으로 향하였다. 나는 일상적이지 않은 카페의 위치에 의아했고 빠른 걸음으로 쫓아 갔던지라 목적지를 알리는 어떠한 사인도 발견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바로 그런 점이 모르는 곳을 처음 방문할 때의 흥미로움 일 수 있기에 한 걸음 한 걸음이 모험가의 심정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는 계단을 오르다가 카페가 문을 닫았을 수도 있다는 말을 꺼내니 궁금증은 한껏 증폭되었다. '아니 세상에 무슨 카페가 여덟시도 되지 않아 문을 닫냐고.'

그래도 다행이 추위를 무릅쓰고 온 정성이 통했는지 벽이 통째로 열리듯 자동문이 작동하였고 드디어 기쁜 마음으로 실내에 들어설 수 있었다. 역시 예상한대로 보통의 카페와는 확연히 달랐다. 인테리어 소품들과 악세사리들이 판매용으로 여기저기 세팅되었고 중앙에는 made in italy라고 적힌 아주 오래된 테이블이 제각각으로 생긴 의자들과 함께 놓여 있었다. 그 옆으로 3~4인용 자리가 마련되었는데 바닥에 낮게 깔려 공간을 더 널찍이 느낄 수 있게 하였다. 오리지널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앉은 의자도 어느 유명한 디자이너의 작품이었고 카페 전체적으로 앤틱한 냄새를 풍기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h양은 벽에 걸린 거울을 탐내기도 하다가 뒷편의 서랍장을 흥미롭다는 듯이 뒤적였다.

"아 죄송한데 그거는 저희 개인 사물함이에요."
직원이 완곡하게 제지하며 눈으로만 감상할 것을 권했다.

"아마 니가 이 서랍을 열어본 천 번째의 사람일거야."
그만큼 뭔가 비밀스럽고 신기한 보물들로 가득차 있을 것 같이 낡고 탐스러운 판도라의 상자들이었다.

알고보니 이 곳은 예술 혹은 작가 활동을 하는 몇 몇 지인이 모여서 만든 그들만의 작업실 겸 카페였다. 그제서야 공간의 성격과 카페의 이름이 명쾌하게 이해되었다. 오히려 카페의 기능이 제일 하위에 속하는 것 처럼 보였다. 그만큼 부엌의 영역은 작았고 손님도 우리 밖에 없었다. 친구는 스콘과 핫초코를 시켰고 카페인 섭취를 자제하는 나도 커피 보다는 핫초코가 좋았다. 그러다 갑자기 계산 전에 변덕이 생겨 잉글리쉬 브렉퍼스트 티에 우유를 추가해 밀크티를 자가 제조해 먹으려고 했으나 주인은 그러면 맛이 너무 밋밋하다며 이 곳의 핫초코는 진짜 초콜렛을 녹여 만들기 때문에 아주 진하고 맛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순간 스페인에서 경험했던 석유 원액처럼 진득허니 독한 리얼 핫초코가 떠올랐지만 이러쿵 저러쿵 따지고 싶지 않아서 역시나 핫초코를 선택하였다. 우려했던 바와는 달리 목 넘김도 어렵지 않고 초코렛 향도 진한 핫초코가 나와 매운 오징어 볶음을 저녁으로 먹은 우리의 얼얼한 입을 달래주었다.

그리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뜬금없이 유레카를 외치고 말았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내가 더 넓은 공간을 바라볼 수 있게 자리 잡은 것이 첫 번째 이유겠고, 대화 주제를 다양하게 가져보려고 머리를 열심히 굴린 것이 두 번째 이유쯤 되겠다. 나는 졸다가 흠칫 놀란 사람마냥 눈을 크게 뜨며 주위를 다시 한 번 둘러 봤고 이제는 확신이 선다는 듯 당당하게 얘기했다.

"나 여기 알아."
"응?"
"나 여기서 사진전 했었어."
"너 혼자서?"
"아니. 내가 속한 사진 클럽에서 했어가지고 나도 참여한거지. 근데 나는 그 때 네덜란드에 있어서 사진만 보내준 거라 실제로 와 본 건 오늘이 처음이야."
"그랬구나. 다음에 또 하면 나 꼭 초대해줘."
"아 물론이지. 그때 우리 부모님도 오셨었는데..."

그랬었다.
2006년. 내가 속한 하이엔드딴따라사진클럽에서 전시 장소로 택한 곳이 이 곳이었다. 나는 네덜란드에서 막 졸업을 한 상태였고 그래서 직접 참여는 못 하고 사진만 필름스캔해서 파일로 보내 주었었다. 직접 작업을 함께 하지 못했기 때문인지 실상 나의 사진들은 보내준 것에 비해 몇 작품 걸리지 않아 아쉬웠었다. 더욱이 다 함께 모여 전시장을 채워나가는 과정을 누군가의 사진으로만 봐야 했을 때 그 자리에 내가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웠었다. 그래서 사진전을 한 셈이지만 거기에 대한 실제적인 경험, 기억, 감상 따위는 남아있질 않다. 판매가 되지 않은 사진 몇 장이 되돌아 왔을 뿐이다. 그런데 그 뒤로 2년 후 내가 그 곳에 앉아서 기억상실증 환자처럼 신기하게 주변을 둘러보고 아무렇지도 않게 차를 마시고 있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지만 운명처럼 나를 이끌고 억지로 이 곳을 찾아 준 친구에게는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였다. 이로써 막연하게 허공을 떠돌던 나의 기억은 어느정도 제자리를 찾아 물질 속에 녹아들 수 있었다.

지금 그 때를 생각해 보면 우리 클럽이 가장 왕성한 활동을 했던 전성기였고 전시를 기점으로 멤버들은 조금씩 각자의 삶에 더 집중하게 되었다. 그 와중에도 변함없이 사진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열심히 사진 관련 자료들을 뒤적이는 사람들이 있지만 무슨 카메라가 나온다더라, 이 렌즈는 어떻다, 이번엔 이 걸 샀다는 둥의 장비에 관계된 사항들이었고 정작 사진은 각자의 컴퓨터 폴더나 개인 블로그에 더 많이 들어가 있었다. 나 같은 경우도 2007년에 귀국한 후 한동안 한국에서는 대체 뭘 찍어야 하나 많이 망설여 하고 고민도 해 봤으며 그나마 요즘에 찍은 사진들도 보도용 사진이나 건축/인테리어 사진이 대부분이라 정작 전시를 위해서 내 보일만한 결과물이 마땅치 않다. 매 년 전시에 대한 얘기가 한 번쯤은 누군가의 입을 통해 언급되긴 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 누가 선뜻 나서서 열심히 끌어 당기지 않는 이상 딴따라클럽의 2회 전시는 언제라고 기약할 수 없는 일이다. 그까짓 옛 추억하나 상기시켰다고 혼자 감격해서 '우리는 꼭 다음 전시를 성사시켜야 합니다'라며 회원들의 멱살을 잡아 당길 수 없는 노릇이고 당장 내일의 밥 벌이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수익도 없는 전시를 강행할 당위성도 찾을 수 없다. 오늘은 그냥 옛날 사진이나 꺼내 보면서 흥분을 가라앉혀야겠다. 





포스터 디자인: ageha
그 밖의 사진 출처: 딴따라클럽

그리고...
지인이 고맙게도 자세히 리뷰해 준 덕분에 더욱 현장감을 잘 느낄 수 있었던 사진들.

전시장 풍경_1
전시장 풍경_2
식신원정대를 잠깐 보다가 등갈비 요리가 나오는 걸 보니 갑자기 저번 달에 먹었던 청담동 코끼리의 돼지 요리가 생각나더라. 삼겹살은 미국산이고 등갈비는 프랑스산이었지만 둘 다 초벌 구이를 잘 해서 그런지 평소에 먹던 돼지 맛이 아니라 꽤나 고급스러웠다. 기름도 쫙 빠진 상태라 두툼한 살을 그저 씹어대기만 하면 그만인데 등갈비는 살짝 매운 양념이 추가되어 더욱 감칠 맛 났다. 얻어 먹은 거라 가격을 모르고 마구 먹었는데 이제와서 보니 1인분에 12000원이나 하는 좀 비싼 메뉴였다. 아무래도 청담동이라 그런 것도 있겠지. 어쨌든... 12월에는 교보통갈비, 코끼리, 토니로마스, 식신원정대에 나오던 곳 아무데나 한 군데 가서 야만스럽게 갈비살을 뜯고 싶다. 그 밖에 그동안 먹고 싶었는데 못 먹었던 음식으로는 팔진초면, 팬케잌 혹은 와플이 있으며 얼마전 먹었지만 구반포 애플하우스에 한 번 더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단, 상기 메뉴를 혼자 주문해서 먹는다면 누군가에게 폰카로 도촬당해 구슬픈 음악과 함께 인터넷에 올라 갈 여지가 있는 바. 나와 뜻을 함께 할 용기있는 멤버를 모집한다. 딱히 시간이 없다면 밥만 먹고 헤어져도 좋을 정도로 목표는 일단 먹는 데에 둘테니 지원 바람.
면역력을 억제시키는 주사제로 강직성 척추염 치료를 하고 있는 요즘, 날씨가 추워지면서 더욱 신종 플루가 만연할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예측은 집 밖에 나가지 말라는 얘기나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가급적 대중 교통을 이용할 때에는 마스크 착용을 하고 시도 때도 없이 손을 씻는데 아무리 그래도 감기 걸린 사람과 일대 일 정도로 만나야 할 때에는 혹시나 혹시나 하는 마음 때문에 앉은 자리가 불편하기 이를 데 없고 나의 노력이 순식간에 물거품이 될 소지가 다분하다. 그동안 가로수길을 왕래하면서 나의 방콕 기질은 많이 치유된 셈인데 이제는 렘 콜하스가 선언했둣이 '자발적인 죄수'가 되어 좀 더 세상이 안정될 때까지 숨을 고르고 있어야 할 것 같다. 그래서 올 겨울은 대부분 집에서 작업을 하려고 준비 중인데 가장 시급한 것은 바로 초등학교 때 부터 쓰던 책상을 버리고 2인 정도가 쓸 수 있도록 만든 길다란 책상이다. 아래 사진에서 보았듯 스캐너, 타블렛, 패드콘트롤이 마치 하나의 기기처럼 샌드위치 모양을 취하고 있고 그림을 그릴 때에는 컴퓨터 키보드를 치워도 간신히 a4 한 장 들어갈 자리 밖에 나지 않으니 조금만 큰 그림을 그린다거나, 채색을 하겠다고 할 때에는 오기사디자인을 찾는 것 외에는 달리 도리가 없다. 그래서 실로 과감하게 1800 x 800(단위:mm) 크기의 아주 심플한 책상을 저렴한 가격에 구입을 하였고 드디어 이 전자기기, 메모장, 카메라, 씨디, 핸드폰, 영수증, psp, mp3, 시계, 외장하드, 공유기, 충전기, 스피커, 액자, 달력...으로 둘러싸인 현대판 슬럼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동면 환경을 구축하겠노라 결심한 것 보다 더 골치아픈 문제는 책장을 반대편 벽으로 옮겨 긴 책상이 들어 설 공간을 마련해주는 작업으로 상당한 노동이 필요한 일이다. 예전에 네덜란드에서 이케아 책장을 조립할 때에도, 거기에 가득찼던 책을 박스에 포장해 한국 집으로 보낼 때에도 삭신이 쑤시는 경험을 했던 바 더 무겁고, 많아진 책들 앞에서 나는 시작도 전에 이미 잔뜩 쫄아 있었다. 그래도 주말이 아니면 책장을 옮길 때 가족의 힘을 빌 수 없으니 조심스럽게 한 뭉텅이의 책을 잡아 바닥에 내려 놓는다. 시작이 반이다-그리고 결국 마지막은 창대하리라는 주문을 읊으며 구체적으로 뭐가 들었는지 아직도 확인 안 된 수 많은 책들을 차곡 차곡 쌓았다. 그러는 틈틈이 메이저리그 월드시리즈의 상황도 확인하니 아주 못 할 일도 아니었다. 한 시간 쯤 지난 뒤 아버지의 도움을 얻어 텅 빈 책장을 반대편 벽으로 옮기자 실로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탄력있는 패딩점퍼를 하나 해 입어도 될 만큼 어마어마한 양의 먼지와 머리카락이 가득하였다. 보이지 않는 미세한 먼지들이 보일락 말락한 틈바구니를 비집고 들어가 수 년동안 빼곡히 쌓인 걸 보니 그야말로 이건 세월이 만든 예술이나 다름 없었다. 나의 머리카락 들이 먼지들의 응집에 조금 일조를 하긴 했지만 어짜피 의도한 것은 아니니 이건 순수하게 자연의 몫으로 돌렸다. 먼지가 없는 세상을 진정한 유토피아로 정의하시는 어머니께서는 마치 공소시효가 말소되기 십 분전에 범죄자의 거처를 기습한 형사처럼 기쁨에 겨워하셨다. 우리가 이렇게 더러운 곳에서 산다느니, 이래서 가구를 2년에 한 번씩 옮겨야 한다느니 장갑 낀 손으로 먼지를 한 움큼씩 훔치실 때 마다 삶의 교훈을 한 마디씩 읊으셨다. 어짜피 몇 년 후에는 다른 쪽 벽으로 간 책장 아래 먼지 마을이 형성되겠지만 당장 눈 앞의 더러움을 제거하신 까닭에 책장을 옮긴 건 아주 좋은 결정이었노라며 흡족해 하셨다.

이제 다시 책을 넣어야 하는데... 그래도 책을 빼는 것 보다는 꽂아 넣는 것이 더 수월한 듯 느껴졌고 가로, 세로 엉망으로 놓였던 책들이 처음처럼 가지런한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물론 나보다 더 꼼꼼한 성격의 사람이었다면 이번 기회에 도서관 같은 배치를 구현했겠지만 나는 가끔씩 원하는 책을 찾아 헤매다 다른 흥미로운 책을 발견하기도 해서 일종의 우연성이 일어날 기회마저 없애긴 싫었다. 대신 조금이라도 더 여유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굳이 가지고 있지 않아도 될 책 혹은 자료들이 있는지 예전 물건들을 뒤적거리게 되었다. 그러다가 대학교 때 들었던 수업에 관한 귀중한 자료들을 재발견 하였고 이젠 플레이 할 이유가 없는 게임 씨디들을 정리한 대신 나우누리 시절 친했던 사람들과 주고 받았던 메일을 발견하였다. 그동안 살면서 아쉬웠던 점 한 가지는 나우누리 텍쳐 시절의 글들을 갈무리 해 놓지 않았던 것이었는데 비록 영양가는 없지만 하루에도 수 없이 싸질러댄 글 들이 가끔 궁금할 때가 있었다. 초등학교 때 써 놓은 일기장을 보며 즐거워 하듯 대학 때의 일상도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 때에는 그런 것들이 소중할 거라고는 왜 생각도 못했나 모르겠다. 그래도 99년에 사람들과 주고 받은 메일들은 텍스트 파일로 백업되어 씨디에 있는 것을 발견하니 나 역시도 책장 옮기길 잘 했구나 칭찬하게 되더라. 메일들의 내용은 아직 일부만 확인 했을 뿐인데 진짜 별 거 아닌 내용들이지만 마치 내가 10년 전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받게 하였고 복잡한 회상에 잠기게 하였다. 메일의 제목은 모두 이상한 숫자들로 코드화 되어서 하나를 읽을 때 마다 파일명에 메일 준 사람의 이름을 적기로 하였다. 지금은 전혀 연락조차 안 하고 어떻게 사는지 관심도 없는 사람이 있고, 지금 더 친해져서 메일을 주고 받을 필요 없이 바로 바로 전화로 해결하는 사람도 있고, 이제는 더 이상 메일을 보낼 수 없게 된 사람도 있었다.

올 겨울은 건강이 특히 염려가 되어 집에서 작업을 많이 해야겠다는 생각이 실로 오랜만에 방 배치를 바꾸는 결과를 낳았고 그와중에 내가 나를 위해 숨겨둔 선물을 십 년만에 찾게 된 즐거운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더욱이 위생은 개선되고 등 뒤로 책장이 위치하니 화상 채팅을 해도 부끄럽지 않겠다. 그냥 곰처럼 조용히 동면할 생각이었는데 아직 열지 않은 메일들이 도토리처럼 쌓여있으니 설치류로 변신을 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이번 대변혁으로 인해 무언가를 정리한다는 것에 대한 새로운 매력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버리거나 보기 좋게 모으는 행위이기도 하지만 잊혀진 것을 환기시키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혹시나 추위가 길어지거나 해도 크게 걱정되지 않는 건 아직 정리해야 할 필름과 사진들이 많기 때문이다. 옛날 냄새 풀풀 풍기는 앨범 하나 골라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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