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ESO(네덜란드 교육진흥원)의 의뢰를 받고 5월 말에 작성했던 유학 경험담을 올립니다.
제가 네덜란드와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결코 대단치 않습니다. 미국, 영국을 제외하고 영어로 건축 석사 과정을 밟을 수 있는 곳은 그리 많지 않으니까요. 물론 나중에 합격 통지를 받고 고민을 하긴 했습니다. 가히 세계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더군다나 장학금도 받을 수 있었던 뉴욕의 학교를 갈 것인가 아니면, 물가가 상대적으로 저렴하되 전혀 모르는 세계에서 나만의 삶을 개척해 나갈 것인가 말이죠. 결국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호하는 뉴욕을 대신해 네덜란드 로테르담을 선택하게된 것은 어디까지나 주류에서 일탈하면서 남과 다른 삶을 살고자 하는 반항적 원심력 때문이었습니다. 더불어 유럽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미디어를 통해 어설프게 접한 네덜란드 현대 건축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미국보다 저렴한 물가가 주요하게 작용했습니다. 기술하고 보니 부끄럽지만 역시 그렇게 설득력 있는 이유는 아니군요. 철저한 준비 없이 무작정 유학을 다녀왔지만 결과만 따져봤을 때 무척이나 성공적이라 생각됩니다. 3년 동안 쌓은 풍부하고 특별한 경험들은 제가 성장을 하고 진짜 하고 싶은 길을 찾아갈 수 있는 용기와 자신감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너무도 개인적인 취향이 개입되고 뒤늦게 깨달은 점이 더 많지만 네덜란드에서 공부를 계획하고 있는 여러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내용들이기를 희망하면서 제가 생각하는 네덜란드의 열 가지 특징에 대해 적어보겠습니다.
1. 소박한 삶
실용적이고 검소한 그네들의 삶은 프로테스탄트 정신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습니다. 치열한 종교 대립의 역사는 화려한 장식으로 뒤덮인 성당과 국가적 상징들을 파괴하였지만 노동을 신성시하고 소박하고 평범한 삶이 일상에 뿌리박히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신을 적극적으로 영접하기 위한 마음과 외부 풍경을 내면화하려는 의도가 만든 커다란 창문으로 인해 집 내부는 민망할 정도로 바깥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호기심에 안을 들여다보면 금새 실망하기 마련인 것이 내부엔 별로 자랑할 만한 물건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냥 보통의 삶 그 자체입니다. 거리로 나서면 수십 년은 족히 돼 보이는 연식의 올드카들과 중소형 차들이 주종을 이루고 우리에게 익숙한 메이커의 옷이나 신발을 신은 사람들을 찾아보기가 여간해서 쉽지 않습니다. 특별히 옷에 신경 쓸 필요도 없고 정 옷이 필요해서 사야한다면 HEMA와 같은 저가 매장 혹은 아울렛을 들르거나 크리스마스 세일을 이용하면 됩니다. 우리나라에서 성인 여성들이 좋아한다던 오일릴리도 네덜란드 브랜드인가 싶을 정도로 희귀한 존재였습니다. 그들에게는 굳이 보이는 것을 통해 무언가를 내세우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 내실을 다지고 절약하는 태도가 배울만한 점입니다.
2. 자연환경
네덜란드는 모두 아시다시피 국토의 1/3이 해수면보다 낮으며 대부분의 땅은 인간의 노동으로 만들어진 것 입니다. 덕분에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인공적인 풍경을 접할 수 있는데 이것이 또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댐으로 물을 가두고 풍차로 바닷물을 퍼낸 후 다른 곳의 땅을 파서 나온 토양으로 새로운 매립지를 만드는 과정을 거칩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평탄한 대지에 집과 마을이 서고, 흙을 파서 움푹 파인 땅은 담수를 채워 호수를 만들고 주변을 공원화 시킵니다. 개천과 같은 인공 운하가 도시 곳곳에 그물망처럼 발달해 있고 자전거타고 15분 정도만 가면 광활한 호수가 그림같이 펼쳐집니다. 사방이 평평한 까닭에 자전거가 손쉬운 이동 수단이 되고 노인들은 전동기구에 몸을 의지하더라도 자유롭게 외출할 수 있습니다. 산이 없다는 사실이 그들에겐 일종의 집단적 콤플렉스일지 모르겠지만 세상을 가르는 단순한 수평선은 그들만의 자랑이고 조금만 높은 곳에 오르면 네덜란드 전체가 한 눈에 보일 듯 시원한 전망이 펼쳐집니다.
3. 사회적 가치
개개인의 취향과 의견을 존중하는 자세는 다양성으로 표현됩니다. 또한 네덜란드의 '폴더 모델'이 표방하듯 소수의 의견을 묵살하기 보다는 가급적 모두가 만족할 수 있을만한 타협점을 찾으며 이를 위해 상대방에 대한 관용을 베풀기도 합니다. 이는 열악한 자연 조건과 투쟁했던 오랜 역사에서 기원을 찾습니다. 태풍이 불고 댐이 무너질 때 모두가 협력하지 않는다면 누구도 생존할 수 없는 급박한 상황이 개개인의 중요성을 일깨웠습니다. 게다가 작은 국토에 1700만 명이나 거주하는 까닭에 상대적으로 높은 인구밀도를 자랑하는 네덜란드에서 공존의 문제는 앞으로도 가장 중요한 이슈가 아닌가 싶습니다. 결국 모두가 한 배를 탄 운명이라는 공동체 의식은 개인의 자유 뿐 아니라 타인의 자유도 중요하게 생각하며 개인이 갖는 개성이 사회를 다채롭게 가꾸는 원동력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좁은 땅에서 오밀조밀 벽을 맞대고 있는 전통 주거들을 보면 그 형식은 유사하지만 한 동 한 동의 모습은 조금씩의 차이가 있습니다. 일정한 규칙 내에서 다양한 모습을 구현하려는 전통은 곳곳에 신도시가 들어선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한 가치입니다. 인종, 종교, 직업, 나이, 경제력 등으로 대변되는 획일성을 거부하려는 자세는 남들과 다른 삶을 살고 싶었던 제게 더없이 좋은 바탕이 되었습니다.
4. 교육
제가 다닌 베를라헤 인스티튜트는 건축 전문대학원이기 때문에 학교만의 고유한 교육 프로그램을 갖추고 있습니다. 일종의 연구소이기 때문에 공동의 목표를 위해 최선을 다하도록 유도하고 있으며 성적이 없어 과도한 경쟁을 미연에 방지하고 본인이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있습니다. 고리타분한 선후배관계와 수직하향적 사제관계가 전부였던 삶에서 교수와 학생이 본인의 의견이 옳다고 서로 주장을 굽히지 않는 모습은 충격에 가까웠습니다. 학교의 교육 방침도 일방적인 명령 전달이 아니라 학생의 동의를 구하는 것이 전제되어 있으며 공부하고 싶은 주제와 강사를 선정하는 것도 전적으로 학생들의 의사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학교의 주인은 학생이고 학생은 사회적으로 동일한 건축가이지 일방적으로 가르침을 받아야 하고 교수의 사적인 업무를 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학생이 잘못된 방향으로 연구를 진행한다거나 교수가 더 좋은 아이디어를 갖고 있다면 얼마든지 교수의 의견이 개입될 수 있겠으나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가 본인의 작업에 대해 자부심과 신뢰를 갖고 있냐는 사실입니다. 서로 다른 견해로 한바탕 크게 교수와 싸운 뒤 다음날 교수가 먼저 '우리 아직 친구인거지?'라고 묻거나, 힘들게 학기를 마쳤을 때 '그래서 넌 너의 결과에 만족하니?'라고 묻는다면 즐겁게 공부할 맛이 나지 않을까요.
5. 미술관
어느 유럽이 그렇지 않겠냐만은 네덜란드 또한 대단한 예술적 자산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17세기 황금시대를 누리던 당시의 렘브란트가 그랬고 그 뒤로 베르메르, 반 고흐, 몬드리안, 에셔 등의 걸출한 대가들이 예술사에 큰 획을 그어 왔습니다. 스페인의 프라도 미술관이나 프랑스의 르부르 박물관 못지않게 각 도시에는 다채로운 미술 전시장이 있으며 이들을 찾아다니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즐거운 여정이었습니다. 뮤지엄카드라는 것을 한 번 사면 거의 모든 뮤지엄을 무료로 입장할 수 있으며 국토가 상대적으로 작고 열차 네트워크가 잘 발달된 까닭에 다른 도시로 이동하는 것이 전혀 부담스럽지 않습니다. 흐로닝거, 반 고흐, 레익스, 렘브란트, 코브라, 보에이만스, 쿤스트할, 데 퐁트, 크뢸러뮐러, 반 아베, 마우리츠하위스, 본넨파텐 그리고 각 도시의 시립 미술관까지 섭렵하고 나니 이 좋은 곳을 혼자만 다닌 것이 너무 안타까울 뿐 입니다. 엘 리시츠키의 '프로운 라움'을 복원한 것을 아인트호벤에 위치한 반 아베 뮤지엄에서 뜻하지 않게 만났을 때, 그렇게 좋아하던 반 고흐의 '밤의 카페'를 크뢸러뮐러 미술관에서 보았을 때 느꼈던 반가움과 경이를 잘 간직해서 기회가 된다면 작은 책자로라도 만들어 공유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6. 축구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유럽은 그저 천국일 수 밖에 없습니다. 돈을 낼 여유가 없어서 리그전을 티비로 챙겨 볼 수는 없지만 주말 저녁 하일라이트 편집 방송만 봐도 충분히 한 주의 스트레스가 풀립니다. 제가 있던 당시는 2002년 월드컵의 감동이 박지성, 이영표, 송종국의 네덜란드 리그 진출로 이어졌고 특히 히딩크가 감독을 맡았던 PSV아인트호벤에서의 한국 선수들의 활약은 괜히 뿌듯하기까지 했습니다. 다행이도 챔피언스리그는 공중파 방송에서 중계해 주었기 때문에 학교에서 각국의 친구들과 하나 되어 경기를 관전할 수 있었고 결승전이 있는 날이면 학교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대형 화면 앞에 모여 흥겨운 관전을 하곤 했습니다. 특히나 한국에서처럼 뜬 눈으로 밤을 새우지 않고 유럽 축구를 볼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즐거움입니다. 여기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암스텔, 하이네켄, 흐롤쉬, 헤르토흐 얀 등으로 대표되는 네덜란드 맥주들이겠죠. 학교 갤러리에서 맥주병을 들고 삼삼오오 모여 왁자지껄 떠들다 보면 괜히 우정도 깊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7. 자취 생활
유학을 가게 된 스물여덟이 되도록 가족과 떨어져 살아 본 경험이 없습니다. 그런 제게 자취 생활은 일종의 로망이나 다름없었죠. 그렇지만 외국에서 자취하기란 일단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만만치 않습니다. 집세가 다른 학생들보다 1.5배 많이 들고 식재료를 사 놓아도 음식을 해 먹을 시간이 없어서 다 못 먹고 버린 적도 많습니다. 세금도 혼자 내야 하니까 그만큼 부담이 크죠. 친구들과 함께 살게 되면 외롭지 않고 가끔 그들이 해 주는 음식을 먹을 수도 있으며 집에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함께 해결하는 장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전혀 다른 배경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 살아야 하기 때문에 서로 서로 앙금이 쌓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외국 친구들이 너무 자주 파티를 하다보면 집에서 조용히 쉬고 싶은 사람에게는 큰 민폐나 다름없지요. 저는 집을 처음에 구할 때 사기도 맞아봤고 집 주인이 보증금을 반만 돌려주려고 해서 변호사도 선임해보려고 했고 뜻하지 않게 이사를 하게 되어 짧은 시간에 집을 찾느라 맘고생도 심하게 했었습니다. 심한 바람에 창문이 깨지거나 갑자기 물이 나오지 않아 수리공을 부르기도 하고 윗집 화장실 배관이 터져 하얀 벽을 타고 화장실 오수가 흐르는 비극을 맞이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집은 언제나 제게 편안한 안식처였습니다. 학교 공부로 지친 몸을 이끌고 아늑한 집에서 영화를 보거나 티비를 보면서 쉬는 시간이 제겐 가장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내 공간에서 내 맘대로 해도 누가 뭐라 하지 않는 자유는 인생에서 처음 맛보는 달콤한 것이었죠.
8. 외국어 구사력
고등교육을 마친 유럽의 젊은이들은 영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할 뿐 아니라 보통 3개 국어, 많게는 4개 국어를 구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방학 때 여행을 하다 보면 영어가 통하지 않는 답답한 상황을 자주 접하게 될 것 입니다. 네덜란드는 전 세계를 무대로 장사를 하던 역사가 있고 지리적으로 영국과 가깝기 때문인지 전반적으로 영어가 생활 깊숙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수퍼마켓이나 카페의 종업원은 물론이요 중국 음식점을 경영하는 중국 이민자도 영어 대화에 무척이나 능숙합니다. 심지어 거지도 영어로 구걸을 할 정도이니 영어 하나만 잘 해도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우리나라와는 참으로 대비되는 모습입니다. 게다가 속도와 발음이 친절한 까닭에 학교에서만 배운 한국인 영어 실력으로도 충분히 생활을 잘 영위할 수 있습니다. 네덜란드어를 전혀 할 줄 모르지만 그래서 곤란한 처지에 놓인 적은 한 번도 없고 영어를 못 하는 네덜란드인도 쉬운 영단어들은 잘 이해하며 행정 기관에서 보내는 네덜란드어로 된 편지들은 학교 직원이 친절히 해석해주니 불편함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것 중의 하나가 네덜란드어를 하지 않고도 네덜란드에서 살 수 있냐는 것인데, 물론 네덜란드어를 하면 그쪽 사회와 쉽게 동화되는 장점이 있겠지만 기본 생활을 꾸려나가는 데 있어서는 문제가 없었다는 것이 저의 대답입니다.
9. 건축
네덜란드는 기념비적 건물을 만들어 내세우기 보다는 생존을 위해 수시로 댐을 만들고 물길을 트고 매립지를 만드는데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다보니 관광객을 끌어들일만한 국가적 상징이 부족합니다. 에펠탑, 타워브릿지, 콜로세움, 사그리다 파밀리아 등 이름만 들어도 그 나라가 연상될만한 건물이 없습니다. 기껏해야 풍차 정도일까요. 그래서 도시 상징물들을 배경으로 화려한 불꽃놀이를 선보이는 다른 나라와는 달리 네덜란드의 새해맞이는 무척이나 소박합니다. 암스테르담 담광장에 모여든 사람들이 카운트다운을 하며 넋 놓고 바라볼 대상이 없지요. 그냥 각자 음악에 맞춰 춤추고 알아서 폭죽 터트리고 맥주 마시고 그게 전부입니다. 건축은 특정한 권위나 이데올로기를 강조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삶이 펼쳐지는 무대인 것입니다. 경제적이고 기능적이며 실용적인 가치가 우선시됨으로 인해 자칫 지루하고 획일적인 디자인들이 판을 칠 수도 있겠지만 실상 네덜란드의 현대건축은 과감하고 실험적이고 다양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네덜란드가 현대 건축의 전시장으로 불리게 된 까닭은 알랭 드 보통이 만든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알 수 있었습니다. 알랭 드 보통이 헤이그 인근의 신도시를 둘러보며 당시 네덜란드건축협회 디렉터였던 애런 베츠키에게 그 이유를 물어봅니다. 애런 베츠키가 대답하기를 "네덜란드는 생존을 위해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습니다. 정체된 상태는 곧 부패와 죽음으로 이어지지요.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변화하고 실험적인 건축이 탄생하는 것 입니다." 결국 네덜란드에 있어 태생적으로 결핍된 부분은 거꾸로 토목, 건축, 도시 계획, 조경이 발달하게 하는 기회이자 자극제인 셈입니다. 네덜란드는 국제 규모의 비엔날레를 유치하고 다수의 건축 센터들과 OMA, MVRDV, West8, Neutelings Riedijk, UNstudio 등으로 대표되는 세계적인 건축 설계사무소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건축이 화제가 되고 관광 상품이 되는 것은 네덜란드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며 그러한 대상들이 관광객들의 방문만 기다리는 죽은 건물들이 아니라 여전히 삶의 일부로서 깊이 관계하고 있다는 것은 이들만이 갖고 있는 특징이자 자랑입니다.
10. 건강
자전거를 주로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건강은 자연히 따라오는 혜택입니다. 또한 자전거와 기차를 통한 이동은 차량 사용으로 인한 에너지 낭비와 환경오염의 해결책이 되기도 합니다. 디젤 차량 이용이 많은 유럽에서 네덜란드의 평탄한 지형은 또 하나의 행운이기도 합니다. 거세게 부는 바람과 잦은 강우는 매연을 씻어내며 건강한 환경을 선물해 줍니다. 곳곳에 호수와 운하가 있기 때문에 건조하지 않고 염분을 머금은 바람은 피부에도 좋습니다. 저는 어렸을 적부터 아토피로 심하게 고생을 해 왔는데 네덜란드에 가면 기적처럼 피부가 깨끗해져서 무척이나 행복했습니다. 미국 드라마 '로스트'를 보면 이상한 섬이 등장합니다. 그곳에 가면 앉은뱅이는 일어서고 죽은 사람은 살아납니다. 모두에게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그런 기적을 접하는 사람들이 몇몇 등장하며 저도 그런 사람 중에 한 명이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잠자기 힘들 정도로 고통스럽게 가려운 피부가 로테르담 집에 오는 순간부터 온순하게 바뀌었죠. 독일에서 공부를 했던 친척 형은 몸이 아플 때마다 네덜란드의 바닷가를 찾아 왔습니다. 내륙인 독일에서 접할 수 없는 자연 환경은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겠지만 병을 치유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 것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에너지와 환경에 대한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는 요즘 네덜란드는 많은 범례를 제공할 것입니다.
이상 솔직하고 격의 없이 제가 네덜란드에 관한 열 가지 특징을 적어 보았습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건 결국 본인의 의지와 자세가 중요하다는 것이 저의 지론입니다. 저는 네덜란드에서 공부를 했기에 네덜란드를 얘기할 수 있는 것이고 미국에서 있었다면 미국의 장점들을 찾아 봤겠지요. 물론 네덜란드를 떠나고 싶은 이유도 열 가지 이상 찾아볼 수 있고 대부분의 학생들은 공부를 마치면 런던과 같은 대도시의 삶을 동경하며 떠납니다. 네덜란드는 너무 작고 심심하다는 것이죠. 하지만 본인이 어떤 상황에 처했건 자신이 속한 곳에 대해 알아보려고 노력하는 자세는 꼭 필요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배움에 대해서는 만족할 수 있지만 정작 본인의 삶 자체에 대해서는 특별한 애정을 가질 수 없겠지요. 지금은 비록 네덜란드를 떠나와 있지만 그 때의 경험은 평생토록 좋은 밑거름이 될 것이라 자부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인연을 계속 이어가고 보다 가치 있는 컨텐츠를 만들어 내는 것이 저의 영원한 숙제라고 생각합니다. 네덜란드에서 유학을 꿈꾸는 모든 분들께 좋은 결과가 함께하기를 기원하며 이 글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