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적인 비키와 자유분방한 크리스티나가 정열과 낭만의 도시 바르셀로나에서 경험하는 이국적 연애담으로 우디 앨런 특유의 비범한 설정과 여주인공의 점잖은 나레이션이 빛나는 작품이다. 하지만 일종의 노이즈 마케팅이 아니었을까 의구심을 품게 만드는 번안된 제목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는 심지어 굳이 제공하지 않아도 되는 스포일러성 발언을 담고 있기까지하다. 게다가 의아한 점은 공식 포스터를 봐도 등장하는 여인은 크리스티나와 남자친구의 아내로서 비키는 도대체 왜 퇴출된 것일까 당황하게 만든다.(사실 포스터만 보면 전적으로 한국 번안 제목이 설득력을 갖는다) 자기 신념의 높은 벽을 세워 바른 생활을 유지해오던 비키가 능글맞으나 로맨틱한 남자 안토니오를 만나 정체성에 혼란이 오는 과정 역시 영화의 중요한 텍스트가 아니었던가.

어쨌든 나에게 있어 이 영화는 러브 트라이앵글의 안정성에 대해 역설하는 듯 하다. 비키의 먼 친척 뻘인 사모님은 자상하고 능력 있는 남편과 표면적으로 화목한 가정을 이루는 것 같지만 실상은 남편이 주지 못하는 육체적 만족을 다른 남자에게서 몰래 찾고 있으며, 크리스티나는 안토니오과 마리아를 양쪽에 두고 예술적 동지로서 좋은 균형을 이루고 있다. 크리스티나가 이들 관계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안정된 관계는 일순간에 와르르 무너지고 바르셀로나 거리는 다시 마리아의 광기에 휩싸이고 만다. 우리가 볼 때는 불륜이고 비윤리적이고 관습을 벗어난 삼각 관계가 때로는 둘 만으로는 채우지 못한 빈자리를 메우며 벡터간의 팽팽한 균형을 이룰 수 있음을 얘기하고 있다.(우디 앨런 늙은이가 주책이야) 오히려 엄격한 규범을 지키려 하는 비키의 경우 선택의 갈림길에서 갈팡질팡하며 고뇌하다가 나중엔 죄책감에 휩싸이기도 한다. cbmass를 해체하고 듀엣을 결성한 dynamic duo가 셋보다 나은 둘을 강조하지만 우디는 삼각형이 갖는 기하학적 안정성(수직력, 횡력에 강하다)을 인생사에 대입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영화의 짜릿한 묘미라면 사진을 찍기 위해 하이엔드 디카를 깔짝대는 크리스티나에게 마리아가 사진은 자고로 필름이여라고 훈수를 두며 그녀의 라이카 M7을 들이미는 장면에 있다. 또한 전작에서 영화사에 기리 남을 무시무시한 킬러를 연기했던 하비에르 바이뎀이 뻔뻔한 바람둥이로 나와 멋드러진 웃음과 진지한 눈빛을 통해 또 다른 의미에서 여자를 죽여놓는 장면들을 감상할 수 있다.

( 영화 포스터를 대체하는 이미지는 얼마든지 퍼가셔도 좋습니다.)

★★★☆


선하고 이롭지만 몬스터라는 이유만으로 군 시설에 갇혀 지내야 하는 생명체들이 인류를 멸망시키고 지구를 차지하려는 일개 에이리언과 대적하는 특수 임무를 그리고 있다. 앞선 과학 기술로 압도적인 힘을 자랑하는 외계인에 비해 외계 에너지에 노출되어 거인이 되어버린 여성을 제외한 몬스터들은 별 다른 활약이 없는 것이 다소 아쉽다. 인크레더블스의 캐릭터가 내뿜는 재기 발랄함과 팀웍이 이 영화에서는 보이지 않는달까. 게다가 가장 흥미진진해야 할 후반부의 싸움이 막무가내로 전개되어 뭔가 급하게 불을 끄려 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영화에 등장하는 슬라임 계열의 몬스터 을 보는 것 만으로도 충분한 즐거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사리분별이 어둡지만 순수하고 물리적인 타격에는 절대 무적인 밥은 정말 간만에 창조된 사랑스런 캐릭터임이 분명하다.


★★★

타이타닉에서 불멸의 사랑을 보여줬던 디카프리오와 윈슬렛 커플이 또 다른 고결한 사랑을 연기할 것이라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예상 그대로 영화는 두 부부의 지리멸렬한 일상을 통해 미국 중산층 가정이 보유한 근원적인 문제를 비판하고 있다. 그렇다고는 해도 여전히 먹고 사는 문제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우리네 일상과 비교할 때 너희들이 안고 있는 고민들이 훨씬 고상한 거라고 감히 말해줄 수 있겠다. 무의미한 안정과 무모한 도전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하는 부부의 미묘한 감정 변화가 강한 흡입력을 갖는다. 아메리칸 뷰티, 자 헤드의 감독이자 케이트 윈슬렛의 남편이기도 한 감독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함께 여전히 나에게 깊은 신뢰를 준다. (자 헤드 역시 강추!) 실패한 혁명은 쿠데타라 하지만 시도조차 되지 않은 혁명은 뭐라고 해야 좋을까.

★★★★

 

그야말로 맹자 어머니처럼 울 어머니께서도 일찌감치 8학군으로 터를 잡으셨다. 개교 당시 한강 이남을 대표했음직한 강남초등학교에서 뭐 하나 빠질 것 없이 날고 기던 12세 소년은 상대적으로 코딱지만한 이 곳 초등학교로 전학 오자마자 전국대회를 거쳐 선발된 듯 잘 난 아이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정신이 아득할 정도로 크게 휘청거렸다. 농축액처럼 진하고 강렬했던 당시의 기억은 두고 두고 잊혀지지 않는 패배감의 프로토타입이 되고 말았으나 사람 사는 곳 결국 어디나 비슷같고 인간은 환경의 동물이듯이 나는 어느샌가 제자리를 찾아 이제는 반포동 토박이 소리를 들을만큼 오랜 세월을 함께했다.
 
21년이 흐르는 동안 그 한산하던 도로는 시도 때도 없이 밀어닥치는 차량으로 몸살을 앓고 있으며 밤 하늘에 오프닝 축하 폭죽을 터뜨렸던 삼풍백화점은 세계가 안타까워 할 비극을 낳고 주상복합의 화려함 뒤로 자취를 감추었다. 한국 주택 역사의 한 획을 그었던 주공 삼단지는 copy-paste의 징그러운 반복에도 불구하고 한때 분양가가 가장 높은 재건축 아파트로 다시 역사를 썼고, 보트를 타고 다니는 사람이 뉴스에 나올 정도로 장마에 취약했던 고속터미널 일대는 무빙워크가 사람들을 신속하게 이동시키는 도시의 핵(이 되고 싶었던 열망만을 간직한) 센트럴시티로 변모해 있었다. 방과 후 학생들이 모여 담배를 피우던 유서 깊은 장소, 일명 야리공원 일대는 지하철 9호선의 개통으로 인해 이제는 건강한 역세권으로 거듭났으며, 내가 사는 H아파트 상가에 1호점을 오픈하며 신선하게 출발했던 미스터피자는 이제 350호가 넘는 거대 체인으로 성장하였다.

아파트와 부모님이 친구처럼 늙어가는 동안 어머니가 현명하게 점지하신 이 동네는 꽤나 많은 진보를 이룬 것 같다. 고속터미널에는 3, 7, 9호선이, 교대역에는 2, 3호선이 남북으로 지나며 동쪽으로는 새롭게 9호선 사평역이 뚫려 여의도에 가는 길이 훨씬 수월해졌다. 2,3,7,9호선이라는 전례없는 혜택에 서원초등학교, 원촌초등/중학교, 반포고등학교, 가톨릭의대, 서울교대가 지근거리에 있으며 법원검찰청, 국립도서관, 가톨릭병원, 고속터미널, 메리어트호텔, 신세계백화점, 뉴코어백화점, 고속터미널지하상가, 교보문고, 영풍문고, 한가람문구 등이 위치하니 그야말로 주거 환경으로서 이보다 더 좋은 인프라를 갖춘 곳이 서울에 또 있을까 괜스레 고마워진다. 

하지만 아파트가 디디고 있는 땅은 과거 무덤이었다는 도시전설 때문일까. 이상하게 초등학교때부터 이 동네를 지켜 온 친구들의 인생은 내가 보기엔 하나같이 그저 그런 꼴을 하고 있는 것 같다.(주형아 니네 집 빼고) 나를 포함하여 이 훌륭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입신양명하지 못한 인생들은 그 이유를 과연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하늘이 쪼개지듯 천둥, 번개가 휩쓸고 간 새벽에 뜬금없는 향수와 불안이 머릿 속을 뒤엉켜 놓았다. 
때때로 영화는 다른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음악, 언어, 필름 카메라, 컴퓨터 하드웨어=우리가 일상적으로 누리고 있지만 한 꺼풀 벗겨보면 이해하기 힘든 복잡한 매커니즘을 가진 존재들: 굳이 서로간의 공통점을 묘사하자면 이렇게 밖에 설명할 수 없는 분야들에 대해 남다른 조예를 가진 c형 때문에 나는 이 영화를 선택하게 되었다.

아마도 주문한 밥을 기다리던 중 나누었던 에피타이저 같은 질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에게 가장 슬프게 본 영화가 무엇이냐고 물었고 화두를 꺼낸 사람의 예의상 나는 시네마 천국이었노라 미리 운을 띄웠다. 동석한 여인 한 명은 감성을 일으키는 과정이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답게도 슬픈 영화를 만족시키는 조건이 꼭 눈물일 필요는 없다고 그럴싸한 정의를 내렸다. 그에 반해 c형은 나의 의도에 너무도 충실한 답을 내었는데, 본인은 내 머리속의 지우개만 보면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줄줄 흐른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우리는 약간 고개를 갸우뚱 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영화를 보지 않아서 즉각적으로 뭐라 대응할 수는 없었지만 그게 그렇게까지 심금을 울리는 영화라고는 들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역시 동의할 수는 없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전설같이 회자되는 '8월의 크리스마스'나 '파이란' 이었다면 굳이 의문을 가지려 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더 자세한 얘기를 들려주십사 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나도 몰라. 순간 마음 속에서 괜한 친절함이 터져나왔다. . 좀만 기달려봐요. 내가 얼른 그 영화를 보고서 형이 왜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었는지 유추해 볼게요. 추천하지도 않은 영화를 보게 된 것은 그렇게 순전히 c형의 짧은 대답 때문이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건축 모티브를 좋아하는 나에게 주인공 최철수가 건축가로 나오는 설정은 일단 그것만으로도 무척이나 흥미롭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목수와 현장 감독의 경력을 걸어오다가 갑자기 건축사 시험에 떠억하니 합격해서 괜찮은 프로젝트를 따 내고 동시에 사무실을 오픈하는 과정은 그다지 현실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더군다나 최철수 역을 맡은 정우성 특유의 보헤미안 적인 기질은 우리가 생각하는 건축사의 엘리트적이고 학구적인 이미지와 너무 멀게만 느껴졌다. 뭐 그래도 최철수가 건축가가 되는 과정이 영화의 주제가 아니기 때문에 그냥 한 번 웃어 넘기면 되는 얘기들인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한 장면도 놓치지 않으려 했고 덕분에 체감 시간은 실제 상영 시간보다 제법 길게 느껴졌다. 안타깝게도 영화는 c형과 얘기하기 전에 내가 예상하던 그대로였다. 사랑하는 남녀는 신분차를 극복하고 끝내 결혼을 하였으나 진남진녀(선남선녀보다 우월한 존재. 진남>선남>미남)로 인해 그 어려움마저 진정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누군가 불치병으로 꽃다운 나이에 사망하는 클리쉐에서 벗어나기 위해 끌어낸 치매라는 소재도 낭만적으로 보일 정도로 모든 역경을 미화시키는 저 외모들이란. 대사에 대해 언급하자면 여보 내가 치매 2기래요는 너무 메디칼적이고 내 메모리는 2mb래요는 정치적이고, 내 안에 너 있다를 십분 활용한 내 머릿속에 지우개 있다가 차라리 파스텔 톤인 것은 잘 알겠으나, 머릿속 지우개가 정말 그런 지우개에 불과했음을 깨달았을 때의 허탈함은 잉글리쉬 페이션트가 어떤 고상하거나 낭만적인 메타포가 아니라 정말 문자 그대로 영국인 환자를 지칭하는 것임을 알았을 때의 한 방 맞은 느낌과 다를 바 없었다.


그래도 아무런 이유 없이 한 사람의 무의식을 깨울 수는 없는 법. 나는 영화를 통해 두 가지 단서를 확보할 수 있었다. 첫째로 영화 중간 중간 c형이 너무도 좋아할만한 남미 음악이 풍부하게 나온다는 것이다. 탱고가 꼭 여인의 향기와 같이 탱고 춤을 추는 장면에서만 등장할 필요 없이 실베스터 스탤론과 커트 러셀이 주연한 영화 탱고와 캐쉬에 나와도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는 것처럼, 공사장 먼지를 잔뜩 뒤집어 쓴 남자와 이에 대비되는 고상한 패션 디자이너가 눈이 맞아 동네 포장마차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는 언밸러스에도 라틴의 낭만은 충분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영화 배경에 등장하는 건축물을 보고 반가워하는 것처럼 c형은 남미 음악을 듣고 감동하지 않았을까 일단 진단해 본다. 그 음악에 개인적인 사연이 녹아 있다면 더욱 더.


두 번째로 영화의 원작을 들 수 있다. 영화가 끝난 후 엔딩 크레딧에서 제일 먼저 등장하는 문구는 이 영화가 일본의 다큐를 토대로 제작 되었다는 것이다. c형은 일본에서 10년 동안 거주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영화의 실제 스토리를 일본 방송을 통해 미리 접했을 가능성이 짙다. 그렇다면 한때 열도를 온통 울음바다로 만든 누군가의 사연이 무의식 중에 c형의 눈물샘을 자극하였을 가능성도 짐작해 볼 만 하다. '어라?! 친구라고만 생각했던 아이와 잠시 떨어져 있는 것 뿐인데 왜 나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나는 거지? 설마 내가 그 얘를 사랑하고 있었던건가?'와 같이 순정만화 여주인공 특유의 뜬금없는 무조건반사가 두 딸을 키우는 마흔 넘은 아빠의 가슴 속에 남아 있을리 만무하다고 누가 단정 지을 수 있을까. 


아직 c형에게는 프로이트 뒷통수를 갈기고 콜롬보의 뺨따구를 후려칠 정도로 주도 면밀한 나의 분석을 들려주지 못했지만 그가 동의하든 아니든 어쨌거나 타인을 이해하고자 한 인도주의적 시도 만으로도 영화를 본 가치는 충분하다.

라고는 하지만 영화만 콕 찝어서 냉정히 점수를 주자면 


★★☆

p.s. 엔딩 크레딧에서 보게 된 건축 자문은 이 영화의 가장 즐거운 요소가 아닌가 싶다. 주인공은 건축 자문의 이름을 고대로 따왔으며 영화에 나오는 사무실도 그의 사무실인 것이다. 교과서적인 이름 최철수는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일반명사 '친구'를 대명사화 시킨 장본인이 여주인공 칸나에게 자기 소개를 하는 장면이 잊혀지지 않는다.

'나는 20세기 소년이다.'

세기가 변했음에도 영원히 지난 세기에 머무를 수 밖에 없는 인간의 비극적 운명과 첫 단추를 잘못 채운 것 처럼 자꾸만 어긋나는 인생을 어떻게 수습해야 하는지에 대해 우라사와 나오키는 특유의 짜임새 있고 긴박한 전개를 선보이고 있다. 예의 나오키 만화가 그러하듯 연재 중일 때에는 다음 권이 나오기 전에 이미 주요 사실을 다 망각해 버릴 만큼 인물 관계가 복잡한 까닭에 12권 까지만 보다가 포기해 버린 비운의 만화였다. 하지만 나오키의 이러한 특징은 결국 언제든 다시 꺼내볼 수 있게 만화책을 사서 책장에 꽂으라는 강렬한 메세지로 해석할 수 있다. 비록 구매를 하진 않았지만 3일에 걸쳐 해치운 '20세기 소년'은 만화의 바이블이라 해도 좋을 만큼 놀라운 완성도와 흡입력을 갖추고 있다. 어떻게 8년의 긴 연재 기간동안 이리도 톱니바퀴 돌아가듯 스토리를 착착 진행시킬 수 있는 건지, 아무리 일본 만화계의 시스템이 잘 갖추어져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경이롭기만 하다. 1권 부터 24권까지 사건 순으로 연표를 만들어 본다면 대충 작가가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구성해나가는지 그 패턴을 짐작할 수 있을까? 나오키의 이러한 작업 방식은 내가 앞으로 글을 쓴다고 할 때 한번쯤은 따라해 봐야 할 모범으로 여겨진다.

★★★★★ 

p.s. 결론을 알고나서 다시 훑어보니 몇가지 의문점이 생긴다.
1. '친구'는 중학생이 되어서도 울트라맨처럼 생긴 형상의 가면을 쓰고 다니는데 이게 가능한 일인가.
2. 사람이 성형을 하면 얼굴은 비슷해질 수 있겠지만 목소리나 덩치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3. 초능력을 가진 사람이 셋이나 등장하는데 '신령님'도 혹시 칸나의 가족?
4. '친구'는 꿈에서 자신의 미래를 보는데 정말 예지력이 있는 것인가.
5. 과거에 대한 집요한 집착은 일본 사회 특유의 미니멀리즘적인 정서의 비판인가 아니면 그냥 한 인물의 우연한 인생인가.
6. 미드 로스트와 20세기 소년의 전개 방식은 서로 유사하지 않은가.
내가 이 영화에 실망한 이유는 순전히 포스터 때문이다.
'놓치면 후회할 놈들' '바다를 건너는 한탕' '두 남자의 위험한 거래'
밤 바다의 짙은 청색과 마천루들을 배경으로 한국과 일본을 대표하는 젊은 연기자 둘이 비장한 표정으로 등장하였다.
'보트'라고 무식하게 큰 제목은 쾌속정을 의미하듯(물론 우측 하단에 초라한 보트가 나와 있지만) 역동적으로 휘날리고 있다.
이쯤되면 이 영화의 장르를 짐작했을 때 '스릴러'나 '액션' 쯤으로 치부해도 되지 않을까?

나의 선입견에 감독은 보란듯이 코믹 휴먼드라마를 선사하였다.
파스텔톤의 배경에 두 남자가 환하게 웃으며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포스터만 준비했었어도 그렇게까지 영화에 대해 실망하진 않았을 것이다. 두 시간에 가까운...지겹도록 긴 러닝타임에 굳이 매달리고 싶지 않은 놈들이 나와서 한탕은 커녕 0.2탕 정도로 긴장감이 떨어지는 거래가 이루어진다. 

감독은 한국인이지만 내용은 일본 만화같이 엉뚱하고 초현실 적인 방향으로 전개되며 이야기의 무대도 일본이다. 일본인들에게 과연 이 영화는 어떤 반응을 불러일으킬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생각에 츠마부키 사토시는 그의 필모그라피에 있어 큰 오점을 범한 것으로 보인다.

영화를 보여 준 지인은 그래도 나름 흥미롭게 봤다고 하니 사람의 취향이란 이렇게 다양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로인가. 나중에 내가 만들어낸 결과물에 대해서도 분명 세상 어딘가엔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이 있을테니까 말이다. 



 


프랑스의 찰리 채플린이라 불리는 자크 타티 감독의 1958년작 '나의 아저씨'.
치훈과 예린누님의 추천으로 이 영화를 알게 되었는데 우연찮게도 최근에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자크 타티 회고전이 열린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더욱이 ageha도 이 영화를 보고 싶다고 하니 같이 볼 사람도 생기고 이거 아주 절호의 찬스구나 싶었다.

영화는 일상 속에 침투한 미국식 물질주의로 인해 변질되어버린 생활 방식을 '삼촌'이란 인물을 통해 시종일관 비판하고 있다. 그렇다고 블랙코미디나 심각한 비판은 아니고 풍자에 가까운 것이라서 종종 웃음을 터뜨리며 감상할 수 있다. 프랑스의 아날로그적인 삶으로 대표되는 '삼촌'은 허름한 정장에 담배를 물고 있는 중후한 인물로 아이들처럼 천진하며 삶에 불만이 없는 양반이다. 하지만 기계화, 전문화된 업무에 적응하지 못하기 때문인지 마땅한 직업 없이 유유자적하는 모습은 다소 아쉽기도 하다. 

러닝타임은 110분 정도인데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에 비해 유머의 빈도가 떨어져 다소 지루했으며 1936년도에 만들어진 채플린의 영화보다 기계만능주의에 대한 비판의 강도도 약한 편이다. 그렇다고 딱히 절절한 로맨스도 없고 제3자적 시각으로 일관하기 때문에 조금 건조한 맛이 남는다.   

하지만 서울아트시네마의 존재를 알게 된 것과 찾기 힘든 작품을 보게 된 것에 대해서는 만족하고 있다.

★★★

사진가로 활동하다가 배우로 전향한 지진희씨의 와인에 대한 글과 사진이 담긴 책.
와인은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고 관심도 없기 때문에 (순전히 공부해야 할 것이 많고 비싸서)
책의 내용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지진희씨가 들고 있는 카메라를 보고 순간 눈이 휘둥그레...

그는 라이카 M8과 현행 녹티룩스의 유저였다.
그냥 그렇다고...
현 정권이 들어선 이후 인터넷에서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다느니 이민을 가야겠다느니 하는 글들을 자주 접할 수 있었다. 사실 객관적인 데이타만 봐도 대한민국의 미래는 그다지 밝지 않다. 연평균 수온 증가는 지구 평균 상승률보다 높고 그로 인해 열대성 바이러스나 해충들이 확산되고 있으며 출산률은 점점 낮아져 내수와 생산이 감소하며 과거에는 옷차림이 신분을 구분하는 절대 기준이었다면 앞으로는 외국어 구사 능력이 그러한 잣대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일본은 점점 군력을 증가시키며 언젠가 독도를 빌미로 한 판 뜰 기세이며 김정일 사후의 북한 체제는 그야말로 오리무중에 중국이 호시 탐탐 북한을 먹을 기회만을 노리고 있으니 산을 깎고 땅을 판 후 골재를 배로 옮겨 북해 언저리에 리틀 코레아를 만들어야 시끄러움에서 벗어날 판이다. 두바이에 야자나무 잎 문양으로 인공섬을 만드는 네덜란드의 기술을 도입하여 섬의 형상은 태극을 닮게 하고 음과 양을 가로지르는 섹시한 라인을 따라 베니스와 같은 운하가 펼쳐지게 말이다. 

이 모든게 다 노무현 탓이다, 쥐새끼는 일본으로와 같은 철 없는 악플러를 제외하고는 그래도 앞으로 대한민국의 어른이 될 우리 세대들은 평화, 평등, 민주, 비폭력, 사회주의 등과 같은 이념에 대해서는 꽤나 긍정적인 사고를 갖고 있지 않나 싶다. 물론 모든 가치가 돈에 의해 평가되는 신 자유주의적 발상이 만연하는 것이 미래에 대한 비전을 어둡게 만드는 유일한 요인이긴 하지만 이번의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에서 많은 교훈을 얻지 않았나 무책임한 낙관을 해 본다. 어쨌든 정치적 이유로 인해 대한민국의 미래를 맘대로 결정짓지는 말라는 것이다. 우리가 언제 정치에서 기대를 한 적이 있었냔 말이지. 온갖 역경을 딛고 최고의 위치에 선 김연아 선수와 같은 개인, 촛불 시위를 평화적으로 진행시키려는 시민과 이를 뒤에서 서포트하는 네티즌들을 볼 때 여전히 한국의 미래는 기대할 만 하지 않냐는 것이다. 

이민을 가고 싶다고 섣불리 말하는 사람들은 안쓰럽다. 물론 내 주변에는 그 나라만의 특성에 매료되어 이민을 가서 살아보고 싶노라 장기적이고 현실적인 계획을 짜고 있는 친구도 있다. 글로벌 시대에 이게 무슨 우려할 사항이나 되겠는가? 지긋지긋한 단일 민족의 틈바구니에서 고만 고만한 능력을 갖춘 사람들끼리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사는게 지쳤다는데 오히려 등을 떠밀고 싶은 심정이다. 그저 대세를 따라 남들 가는대로, 이미 기반이 잡혀 앞날을 보장받은 곳으로, 자기 치장의 껍데기를 덮기 위해 선택하는 결정에 대해서만 반감을 갖겠다는 것이다. 또한 정치에 대한 극단적 혐오나 한국 자체를 부정하는 이유를 들어 이민을 가겠다고 쉽게 말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역시 적극적으로 이민을 추천하겠다. 어짜피 같은 하늘 아래 살아봐야 별 도움도 안 될 것 같기 때문이다. 한국이 싫어서 한국을 떠난다 하더라도 유 아 웰컴할 곳은 아무데도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나마 모국이 있으니 어디가서 말이나 통하고 밥이나 벌어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타향살이의 설움도 고려하면서 동시에이민에 대한 큰 소망을 피력하자는 것이다. 

살다보면 모국일지라도 등에 칼이 꽂힐 수 있고 사는 동네가 체르노빌 같이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한 극단적인 상황을 겪은 사람이나 능력이 출중하여 타국에서도 충분히 행복한 삶을 꾸릴 수 있는 사람의 바짓 가랑이를 붙잡고 싶은 것은 결코 아니다. 성찰에 앞서 패배를 선언하며 도피하는 일부의 사람들에게 세상은 그렇게 호락 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유토피아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단어가 만들어질 때 부터 그래야 하는 운명을 갖고 태어났다. 유토피아는 결코 구현될 수 없는 이상향인 것이지 실제로 존재하게 되는 순간 그것은 유토피아가 아닌 현실세계가 되는 것이다. 디스토피아도 유토피아도 거울 너머로 맺힌 허상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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