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에서는 연일 대통령의 서거를 보도하며 얼마나 많은 시민들이 분향소를 찾고 있는가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오늘 강남역을 지나는 길에도 사람들이 퇴근 버스를 기다리는 것 처럼 길게 늘어선 끝에는 작고한 대통령의 사진이 숙연한 모습으로 걸려 있었다. 이용객들의 주연령대가 그래서 인지 아니면 정치적 지지층이 그랬기 때문인지 대부분이 이 삼십대의 젊은이들로 구성되었지만 그렇게 혼잡한 강남역에서 자발적으로 추모행렬을 질서있게 구성하는 모습에서 많은 감동을 받았다. 낮과 밤을 구분 않고 봉하마을에 모인 사람들이나 서울 곳곳에 마련된 임시 분향소를 찾아 친지를 잃은 것 같은 슬픔을 비추는 시민들을 보니 어떤 면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우리나라 역대 수장 중 가장 행복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나는 대통령이라는 직책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어쨌거나 권력의 가장 꼭대기에 앉은 사람인만큼 반 권력지향적인 나의 성격과는 완전히 대비되는 위치이기 때문이다. 또한 여지까지의 삶을 돌아볼 때 정말로 나의 이상을 실천해 줄 것 같은 대통령 후보가 없었기 때문에 매번 선거날에는 그냥 집에서 자빠져 쉬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지만, 선거는 국민의 의무라는 세뇌와 투표를 안 했다고 하면 벌레 보는 듯 하찮게 보는 주변 시선이 싫어서 억지로 나가서 누군가를 찍고 오기는 했다. 대통령이 뭐 그렇게 대단한 거라고 그렇게들 못 돼서 안달이며 그걸로 편이 갈려 서로 으르렁대고 헐뜯으려고 하는 건지 나로서는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후보의 정책이나 인간 됨됨이에 관심은 있지만 그 우두머리를 중심으로 21세기 삼국지를 연출하는 모습이나 종교를 연상시키는 듯한 지지자들의 과잉 반응들까지 동조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고보면 고등학교 때 정치,경제 과목을 제일 싫어하고 못했으며(이건 선생님 탓이 크다) 삼국지는 한 번도 읽은 적이 없고(읽고 싶지도 않고) 종교마저 거부하는 나인만큼(역시 종교도 교리는 맘에 드나 신도들의 행태가 맘에 들지 않는다) 위와 같은 반응은 어느 날 갑자기 형성된 것도 아니다. 비주류와 B급 문화 지향적인 자세 또한 그 근거로 댈 수 있을 것이다. 

뭐 꼭 영웅이라고 해서 에어포스 원이나 인디펜던스 데이에 나오는 대통령처럼 목숨을 걸고 액션을 취할 필요는 없다. 영국이나 네덜란드의 여왕처럼 박제된 아이콘이 되는 것도 원치 않으며 그런 면에서는 차라리 권위를 갖되 스스로를 낮추려하고 퇴임 후에는 귀농하여 보통 시민으로 돌아간 노무현 대통령의 인간적 행보가 나에게는 더욱 영웅적이며 아이콘이라고 할 수 있다.(정치적 행보는 논외로 하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비극적 결말에 대해 여타의 젊은이들 처럼 끓어오르는 무언가를 느끼지는 못하고 있다. 한 때 국가의 수장이었던 사람이 비통한 마음으로 자살을 택했다는 점이 안타까울 뿐 누군가를 심판해야 한다는 비장함이나 쥐새끼는 죽으라는 식의 악의는 눈꼽만치도 들지 않는다. 울컥하는 분노는 아니더라도 가슴에 파고드는 뜨거운 비애로 인해 부모를 잃은 것처럼 검은 정장을 입고 출근을 한다던지 또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린다는 반응에도 충분히 이해는 가지만 내가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는 고개를 갸우뚱 하게 된다. 

어찌보면 굉장히 슬픈 일이다. 세상을 살면서 내 전부를 바칠 수 있을 것 같은, 혹은 나의 이상을 실현해 줄 수 있을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 정치인을 아직 만나지 못한게 말이다.(물론 가장 근접한 후보는 있으나 그가 대통령이 될 확률은 아아...꿈만 같아라) 아마도 나와 직접 관련된 사안들의 잘잘못은 어디까지나 나하고만 관계된 일이라 생각하고 누군가에게 쉽게 책임을 전가하거나 스스로를 투영하지 못하는 개인주의적 성향 탓일수도 있다. 그리고 아직 진심으로 남을(혹은 국민을) 생각할 만큼의 여유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심지어 더욱 앞 날이 어두운 것은 다음 대통령 후보로 나올만한 사람들은 더욱 답이 안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다가 진짜 누구처럼 '불심으로 대동단결'에 한 표 행사하는 일이 오지 않을까 두려워진다. 국가라는 테두리 안에서 사는 한계로 인해 반드시 어떤 누군가를 대표자로 지명해야 하는 운명인 것은 잘 알겠으나 대통령이라는 위치는 아직도 감정적으로 닿을 수 없는 저 멀리에 있는 존재로만 느껴진다.  

p.s. 글 쓴 후에 생각해보니 노무현 대통령이 집권했던 5년 중 3년을 외국에서 보낸 것도 하나의 이유인 것 같다. 노무현 대통령보다 막시마여왕의 얼굴을 더 많이 봤으니 말이다.
도시와 전원에 관계 없이 인생이란 참으로 피로충만한 과정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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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같이 피곤함에 쩔어 일찍 잠을 청했는데 허리가 쑤셔 중간에 일어난다면 중요한 거사를 망친 사람과 같은 낭패감을 맛보게 된다. 좀처럼 다시 잠을 청할 수 없는 신진대사 덕에 대개 4~5시가 될 때까지 뜬 눈으로 지샐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낮에 하던 일을 하게되면 뇌가 활성화되기 때문에 꼬박 밤을 새게 되는 역효과를 낳는다. 가끔 새벽에 생중계되는 uefa 챔피언스리그를 보는 행운을 잡을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멍하니 인터넷을 보며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거나 만화책을 보며 가급적 빨리 눈을 피로하게 만들려고 노력하게 된다. 

작년에 한창 몸이 아팠을 때는 잠을 자는 것이 참으로 고역이었다. 어두운 방안에서 한참을 뜬 눈으로 누워 있다가 창문 밖으로 동이 서서히 트면 단잠을 방해하던 부정한 기운들이 슬슬 곁에서 떨어져나갔다. 그야말로 밤이 너무 길고 외로웠으며 이러다 한 순간에 확 돌아버리는 것이 아닐까 무섭기까지 하였다. 새벽 2~3시쯤에 바쁘게 걸어와 대문 앞에 신문을 던지는 배달원이나 가로등에 비치는 나뭇가지들의 거친 움직임이 괜시리 반가울 정도였으니까. 라디오를 켜게 된 것은 아주 우연한 일이었다. 남들보다 일찍이라고 할 수 있는 초등학교 때부터 라디오에 마음을 빼앗기긴 했지만 대학을 들어간 이후 밖에선 친구들과 술 먹고 집에선 오락하기 바빠서 라디오는 금새 나의 일상에서 멀어져 버렸다. 비쥬얼 시대에 발 맞추기 위해 그동안 라디오는 꽤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다시 라디오를 찾게 된 것은 그것의 가장 원초적인 기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꾸준히 잠을 청하면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소리를 듣는 것 뿐이고 더군다나 정신이 피폐해있던 순간에 디제이의 나즈막한 음성은 더없이 좋은 위로가 되었다. 

여성 청취자들에게는 참으로 안 된 일이지만 심야 디제이가 주로 여성 아나운서들인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지금은 서장훈의 신부로 잘 알려진 오정연 아나운서를 비롯하여 손정은, 문지애, 최현정 아나운서들과는 시간이 갈수록 친분을 쌓아가는 듯한 묘한 느낌이 있었다. 같은 어둠을 보며 깨어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외로움은 크게 줄었기에 때론 녹음 방송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그 마음을 잘 아는 듯 디제이들은 실시간으로 문자 메세지를 받는 것 같은 인상을 주어 현장감을 살렸다. 새벽 방송일수록 원고를 읽기보다는 음악을 많이 틀지만 나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좋았기 때문에 가급적 사연 소개에 귀 기울이게 되었고 행여 노래를 틀기라도 하면 금방 토라져 다른 채널로 옮겨가기도 하였다. 따라서 간혹 게스트가 나와 방송을 할 때에는 반가움과 친근감은 배가 되었고 매주 그 요일은 기대로 가득찼었다. 문지애 아나운서와 스윗소로우 멤버가, 손정은 아나운서와 여자 리포터가 기대에 부응하여 좋은 콤비가 돼주었다. 고등학교 때에는 얼굴도 모르던 박나림 아나운서의 차분한 목소리가 그렇게 좋았는데 작년에는 문지애 아나운서가 그 역할을 대신해 뒤엉킨 실오라기들을 하나 하나 단정하게 풀어 주었다. 나보다 어린 사람이었지만 그때만큼은 누나나 엄마와 같은 기분이었다.

그런 밤 귀신같은 생활을 접고 라디오를 다시 멀리하게 된 것은 다른 건강상의 이유에서였다. 원체 저녁 식사 이후에는 음식 섭취를 안 했는데 뇌가 활동을 하다보니 위산은 계속 분비가 됐나보다. 위에서 야식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리며 오두방정을 떠는 사이 침만 꼴깍 꼴깍 삼키고 있었으니 예전에 치료했던 위궤양이 다시 재발한 것이다. 3시쯤만 되면 배가 쑤신 까닭에 라디오건 뭐건 다 제쳐두고 정상적인 생활 패턴으로 복귀해야 된다는 위기감이 엄습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그 하기 싫은 내시경을 또 해야 하니깐 말이다. 그 후로 물을 많이 마시고 참마를 씹어먹는 노력 끝에 위궤양은 잠잠해졌지만 심야 라디오를 열심히 듣던 습관은 계속해나갈 수 없게 되었다. 대신 요즘은 저녁에 운동장을 걷거나 집에 오는 길에 메이비의 볼륨을 높여요와 같은 하이틴 위주의 방송을 듣게 되는데 이건 또 이 시간대에 필요한 정서를 잘 보듬어주고 있어 나쁘지 않다. 라디오의 매력과 영향력을 너무 잘 알다보니 생애 한 번쯤은 라디오 디제이를 해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여행을 딱히 좋아하지도 않아 매일 출근 가능하며 어려서부터 방송에 관심이 많았으니 알고보면 훌륭한 디제이의 자격을 갖추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는 날이 온다면 새벽 두시에서 네시 사이를 노려보고 싶다. 목소리를 낮게 깔고 제대로 느끼하게 오프닝을 말해야지.   
이가 쑤신 것은 꽤 되었다. 네덜란드에 있을 때부터 좌측 어금니에 뭔가 이상이 있지 않나 의심해 볼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치과에 갈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니 치과에 스케일링 하러 정기적으로 갔었지만 금으로 봉한 치아였기 때문에 의사도 발견하지 못하였다. 평소에는 괜찮다가 음식물을 씹을 때 본격적인 통증을 느낀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치과에 갈까 말까 망설이다가 몇 달 훌쩍 지나갔고 그러던 중에 인터넷에서 무서운 기사를 한 꼭지 읽게 되었다.

나는 바보같이 금으로 한 번 봉하면 그게 평생가는 줄 알았다. 눈으로 보기에만 멀쩡하면 괜찮겠다 했지 금과 치아의 틈새로 충치균들이 들어가 거대한 쉘터를 만들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97년에 어금니 곳곳에 금칠을 했으니 어언 12년이 다 되었다. 기사를 읽고 부랴 부랴 동네에서 용하다는 치과를 예약했을 때는 이미 많이 늦은 상태였다. 본래는 금니 아래에서 치아가 썪으면 세멘이 부식하고 금이 떨어진다고 했는데 나의 경우에는 금은 아주 단단히 붙어 있었고, 완벽하게 위장 된 치아 속으로는 완전 난리가 아니었다. 그야말로 플라그들은 이상향을 찾은 것이다. 

긁어도 긁어도 끝이 없다가 신경치료를 해야 하는 마지노선에 다가갔을 때 비로소 의사는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다. 거울로 한 번 안을 보라고 했을 때 괜찮다고 할 걸 파사드만 남은 어금니를 보고 있자니 괜히 미안하고 슬퍼졌다. 결국 그 치아는 크라운을 씌우기로 하였다. 그렇다. 초라해진 나의 치아에 금을 두른 인공 치아를 덮어 씌우는 것을 크라운이라고 하더라. 이제야 뒤늦게 왜 누구는 럭셔리한 금니를 끼고 있고 누구는 위에만 금이 살짝 봉해졌는지 깨닫게 된다. 그렇게 훈장을 달듯 고통스러운 치료 끝에 왕관을 쓰게 되었다. 가짜 이를 달고 있자니 이를 깨물 때 어색한 느낌이 나고 반짝 거림이 싫어 하품도 조심스러워 진다. 사실 아프고 어쩌고 하는 것 보다 치과에서 제일 무서운 것은 카운터에서 치료비를 선고받을 때이다. 손에 쥐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고 금이 과연 얼마나 쓰였을지 궁금하기만 한데 총액은 백만 단위를 넘어섰다. 물론 크라운 하나에 저 가격은 아니고 네덜란드에서 콜라 중독이었던 습관 때문인지 나머지 어금니들도 사정은 비슷 비슷했다. 일단 치아 점검을 하려면 필연적으로 기존의 금을 벗겨내야 하고 새롭게 덧 씌워야 하는데 참으로 값비싼 작업이 아닐 수 없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으로 의사에게 치아 관리는 어떻게 해야 하냐고 하니 별다른 방법은 알려주지 않고 일 년에 한 번씩 스케일링 겸해서 점검받으러 오라고만 하였다. 밥 먹고 금방 이 닦는 것 외에는 특별한 왕도가 없나보다. 그래도 한국에 와서 콜라를 끊은 것은 참 잘 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피자와 햄버거를 먹을 때도 우유를 시키는 모범적인 생활을 이어가고 있으니 그만큼의 보상이 주어지겠지.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치과를 다녀온지 일 년이 넘었다면 이번 기회에 꼼꼼히 점검 한 번 받아보길 권하는 바이다.  
때로는 망각의 긍정적인 측면을 찾을 수 있다.
헤어진 여자친구가 연습장 한 구석에 몰래 그린 우스꽝스런 나의 모습에서.
어느날 엄마가 턱 하니 넘겨준 나의 십 년치 일기장에서.
이십 년만에 찾아간 떡볶이 집의 여전한 국물 맛에서. 

아 이런게 있었던가 까지는 아니지만 불과 일년동안 내가 얼마나 그 때의 감동을 기억하지 못하는지 새삼 놀라게 되고 음악과 함성 만으로도 희미했던 오감의 빈 자리가 얼마나 예전 그 모습으로 선명하게 채워질 수 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모든 기억이 어제와 같이 선명하기만 하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가슴 떨리는 경험을 할 수 있을까.

이번 앨범은 지난 공연이 펼쳐졌던 날들을 기념하며 그 때에 맞춰 다시 들을 수 있는 나만의 타임머신이나 다름 없다. 
프롤로그: 4월 30일, 5월 25일
에필로그: 6월 13일, 6월 14일

★★★★☆
(나의 바램이 있다면 이제 제발 김동률 공연은 여자와 둘이 가서 보고 싶다. 하지만 올 가을쯤 있을 앙코르 콘서트 역시 혼자 갈 확률이... 어흑 말이 씨가 되니 참자.)

 
손으로 웃음을 훔치며 지나가는 사람은 호기심을 자극한다. 
누군가와 핸즈프리로 전화중이었건, 이유없이 미친거였든
표정이 살아있는 사람을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뜻하지 않게 눈을 마주치는 사람은 반가운 인연이다.
바쁜 자기 길만 좇거나 선글라스로 감정을 숨기기 보다는
순간이라도 눈을 맞추려는 마음에서 여유를 느낀다. 

소리없이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고결하다. 
아무렇지 않게 침을 내뱉거나 담뱃재를 터는 사람보다
흐느낌마저 주워 담으려는 자세가 아름답다. 
즐겨보는 미드는 하우스, 오피스, how i met your mother 그리고 대망의 로스트가 있다. 영어 공부를 핑계로 가쉽걸이나 힐즈를 추가적으로 보곤 했지만 영어에 대한 절실함이 급격히 하락하면서 이 둘은 섹스앤더시티와 함께 여성용 드라마라는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관심 밖으로 멀어졌다. 저 네 개 중에 가장 끈덕지게 보고 있는 미드가 하우스 인지라 이제는 매주 챙겨보는 것이 일상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다행이 하우스는 여전히 위험한 성적 농담을 일삼으며 심보가 뒤틀려 있고 그럼에도 꾸준히 35분 정도가 되면 빤짝 하고 영감을 얻어 회생불능의 환자를 우습게 부활시키니 참으로 오랫동안 같은 구성을 안정적으로이어나가고 있다. 아무리 메디컬 드라마를 좋아하는 나라도 그레이스아나토미와 같이 연애질 위주의 진행은 참을 수 없는데 하우스는 의학 드라마의 탈을 쓴 추리소설 같으니 로스트와 같은 반전과 긴장은 부족하더라도 나름의 카타르시스를 잘 전달하고 있다. 특히나 상대방의 심리를 분석하는 하우스의 날카로운 직감은 콜롬보의 능청스러움과는 또 다른 재능이다. 어쨌든 이번주에 24화가 방송되면서 시즌5가 마무리되었고 당분간 시즌6을 위한 휴식에 들어가게 되었다. 궁예 연기를 하기 위해 한 쪽 눈에 안대를 차고 다니니 그 눈의 시력이 떨어졌다는 배우의 말처럼 하우스 역의 휴 로리도 고관절에 무리가 올지도 모르겠지만 욕심같아서는 한 십년은 더 그의 명품 츤데레 연기가 보고 싶다. 

이번 에피를 보다가 눈에 들어온 것은 닥터 윌슨의 진료실에 붙은 포스터이다. 미국의 영상 디자이너 솔 바스(saul bass)가 작업한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1958년작 현기증(vertigo)의 인트로 장면인데 윌슨의 굴곡진 인생이 현기증을 느끼고 추락하는 주인공과 닮아있다면 너무 억지일까.

솔 바스에 대해 궁금하다면 그의 작품 이미지만 봐도 작업 스타일이 확 몸에 느껴질 것이다.

휴 로리의 깜찍한 모습이 궁금하다면 프렌즈 시즌4의 14화를 보자.
 
vertigo
★★★★
house
★★★☆ 

클라이브 오웬과 나오미 왓츠가 세계 은행의 음모를 파헤치는 요원으로 등장한다. 경제적 이익을 위해서는 이데올로기, 종교, 국경을 아랑곳하지 않는 금융 기관을 통해 돈 앞에서는 모든 가치가 무력화될 수 있다는 신자유주의적 탐욕을 비판하고 있다. 영화 자체는 그리 매력 없을지 모르겠으나 독일, 이태리, 미국, 터키를 넘나드는 로케이션과 아우토슈타트, 과학 센터, 구겐하임 미술관 등의 유명 건축물들의 실내외가 등장하는 까닭에 건축을 공부한 사람에게는 추가적인 즐거움을 부여한다. 
세계은행의 본사로 나오는 이 곳은 독일 wolfsburg(발음이 어려워서 원어 그대로 표기)에 위치한 아우토슈타트(자동차도시)이다. 아우토슈타트는 폭스바겐의 본사, 공장, 전시장이 모여 형성된 일종의 자동차 테마파크로서 폭스바겐은 람보르기니, 아우디, 벤틀리, 부가티 등의 10여개 브랜드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멋진 차량을 원없이 감상할 수 있다. 어제 포르쉐가 폭스바겐과 합병을 했으니 더욱 엄청난 공룡기업이 탄생한 셈이고 아우토슈타트에서 포르쉐 전시장이 추가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아우토슈타트의 가장 큰 볼거리는 뭐니 뭐니해도 물 위에 세운 두개의 원통형 건물일 것이다. 유리 파사드로 인해 내부가 훤히 보이는 두 건물은 일종의 차량 자동판매기로써 고객이 차를 구매하게 되면 하루동안 저 건물 안에 보관했다가 다음날 양도한다고 한다. 고객들은 아우토슈타트에서 일종의 관광을 한 뒤 회사측에서 제공하는 호텔에서 하룻밤 묵게 된다. 차량을 보관하는 두 개의 타워는 차를 세웠다 빼냈다 하는 로보트 팔이 내부에 있으며 방문객들의 흥미를 위해 수시로 기계 팔이 차량을 자동 주차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가 아니라면 이 건물의 실내까지 들여다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영화의 매력이 바로 이 점이고 장소 섭외는 그만큼 어렵고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우토슈타트의 진입부는 거대 기업의 권위를 나타내기에 최적의 장소이다. 
아인트호벤이 필립스 도시인 것 처럼 wolfsburg는 폭스바겐 도시라고 해도 좋을만큼 무척이나 작은 도시이다. 하지만 현대 건축의 걸작 중 하나인 자하 하디드의 과학 센터가 중앙역 바로 옆에 들어서서 정말 생뚱맞은 인상을 주었다. 과학 센터는 아이들을 위한 과학 체험 전시관으로서 영화에서는 건물이 이태리에 있는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아우토슈타트와 아주 가깝다. 고로 배경은 전부 합성인 것이다. 
건물을 지지하는 콘크리트 구조와 천장의 조명은 미래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만들땐 고생 꽤나 했겠지만 완성 후에는 이렇게 멋진 배경이 된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전시의 조악함과 무분별함에 두 번 놀라게 된다. 아이들이 어찌나 깽판을 쳤는지 이 비싼 건물 내부는 저렴하기 그지 없다. 
과학 센터의 내부로 추정되는 공간. 역시 영화가 아니면 이런 곳을 볼 수 있는 기회는 없다. 사이버틱한 의자 디자인 또한 콘크리트의 차갑고 무거운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이 영화를 보게 한 결정적 이유는 바로 이 구겐하임 미술관 때문이다. 영화 예고편을 통해 구겐하임 미술관 내부에서 총질하는 것을 본 후 과연 얼마나 대범하게 실내를 파괴했나 궁금했는데 막상 영화를 보니 그 수준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천창이 깨지고 전시장이 총알로 벌집이 될 정도니 실제 건물이 아닌 세트라고 예상되지만 너무 실물과 다를 바 없어 놀라울 따름이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정도로 그의 작품을 걸레로 만들었는데 이런 경우 허락은 누구에게 받는지 궁금하다. 영화의 장소 섭외는 미술 감독의 역할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매우 탐나는 분야이고 국내에서 저런 장면을 찍는다면 어떤 곳이 물망에 오를지 혼자 상상해본다. (모든 이의 바램은 국회의사당인가?)

세계 은행의 총재이다 보니 사는 집도 예사롭지 않다. 벽난로 대신 드럼통을 가져다 놓는다면 우리네 현실과 비슷할 듯.
밀라노 두오모에 위치하는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 아케이드도 등장한다. 

★★★★ 




멋지다!!! 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원더걸스, 소녀시대에 그닥 마음이 끌리지 않았는데 일단 2ne1은 원초적 비트와 파워풀한 댄스로 새로운 여성 아이돌의 유형을 만들어낸 것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뮤비는 street, space 두 개 버전으로 만들어서 골라 보는 재미가 있고, 영상미도 뛰어나서 돈 들인 티가 팍팍 나는구나. space버전에서 박봄이 바니걸 의상으로 나올 때 원 떰즈 업! 그리고 산다라박이 '뽜이어~'할 때의 묘한 기계음과 그에 대비되는 인도 신화 모티브에서 투 떰즈 업!!
★★★★☆
일단 제목에서 큰 감점이 들어간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기발한 제목이 생각나는 것은 아니지만 '조폭 마누라', '지구를 지켜라'와 같이 제목에서 상당히 저렴한 냄새가 난다. 차라리 '긴급조치 19호'가 제목에 있어서는 더 나은 것 같다. 독특한 소재에 비해 너무 뻔한 한국식 억지 감동을 유발하려고 해서 아쉽지만 아역 배우의 어른 스러움을 감상하는 것으로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영화이다. 극중 차태현의 집 인테리어와 창 밖으로 펼쳐지는 전망이 무척 탐이 난다.

극중 박보영과 사랑했었던 남자가 입고 있는 티에 주목하라. 나메크 언어 비슷하게 보이는 패턴이 뭔가를 연상시키지 않는가?

장림종 '문자로서의 공간' 1999

디지털 공간 연구를 통해 생성된 다양한 평면들이 티셔츠에 그려진 패턴과 무척이나 흡사하다. 티셔츠의 패턴은 어떤 구성 논리를 통해 만들어진 형상인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전혀 모르겠으나 구축적인 이미지를 프린트 해서 티셔츠를 팔고 싶은 나에게는 상당히 흥미로운 장면이었다. 

영화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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