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말은 돌고 돌아 말썽이 된다 2009.07.10 1
- 왜 그러고 살아요 2009.07.08 1
- 저작권법이 무서워요 2009.07.06
- 090705 2009.07.06 1
- 윤상 6집 '그땐 몰랐던 일들' 2009.07.05
- 미니 노트북 2009.07.05 1
- 맘에 안 드는 노래들 2009.07.04 2
- 산 카를로 알레 콰트로 폰타네 2009.07.02 2
- 소쇄원 2009.07.02
- 하늘을닮은신전, 판테온 2009.07.02
말은 돌고 돌아 말썽이 된다
왜 그러고 살아요
저작권법이 무서워요
090705
윤상 6집 '그땐 몰랐던 일들'
미니 노트북
맘에 안 드는 노래들
산 카를로 알레 콰트로 폰타네
* 출판사 토토북의 의뢰를 받아 작성한 샘플들을 그냥 묵혀두긴 아까워서 블로그에 게재합니다. 아이들에게 건축을 통해 문화와 역사를 알려주기 위해 작성한 글들인데 요즘 아이들의 수준을 너무 높게 측정한 저의 불찰로 인해 퇴짜를 맞은 비운의 졸작들 입니다. 앞으로 한 번 정도 더 도전이 있을 예정인데 그때는 하나의 이야기, 사람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춰 가급적 쉽고, 즐겁게 쓸 예정입니다. 현재로서는 {프랭크 게리-물고기-빌바오 구겐하임 뮤지엄-한국의 조선 산업}의 연결 고리를 드러내는 것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G: 지금 여러분이 보고 계신 아담한 교회가 이태리 바로크 건축의 전성기를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입니다. 1634년부터 프란체스코 보로미니에 의해 설계가 시작되었고 1667년에 완공되었지요. 바로크 건축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올록볼록 부드러운 벽이 바깥에서도 잘 보이지요? 이전까지의 건물을 보면 기둥의 역할이 상당히 중요했습니다. 어떤 종류의 기둥을 어디에 세우느냐에 따라 건축가가 말하고 싶은 얘기가 달라진다고 해도 좋을 정도에요. 하지만 바로크 건축의 경우 기둥은 건물을 받치는 구조적인 역할을 담당할 뿐, 세련된 모습으로 방문자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바로 물결치는 벽면입니다.
토토: 벽이 딱딱한 콘크리트가 아니라 꼭 부드러운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것 같아요.
B: 그렇지? 원이나 직선으로 이루어진 이전 건물들에 비해 더 창조적이고 열정적으로 느껴져. 이게 더 인간적이지 않니?
토토: 인간적이라고요? 인간적이라면 르네상스 시기의 작품들이 인간성을 회복했다고 하지 않았나요?
B: 응. 물론 그렇지. 그런데 그러한 평가는 언제나 먼 훗날에 이루어지는 것이라서 그때 그때에 따라 조금씩 다를 수 있단다. 르네상스는 과거 비잔틴이나 고딕에 없던 인간적인 특징을 부활시켰지만 바로크는 르네상스에 비해 더욱 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지. 르네상스가 인간적이라고 해서 바로크는 그렇지 않다고 얘기할 순 없다는 거야.
토토: 그럼 바로크에서 인간적인 면은 어떤 건데요?
B: 그건 일단 우리가 보고 만질 수 있는 생김새에서 드러나는데 말이지... 음, 아주 오래전부터 서양 사람들은 ‘이상’을 꿈꿔왔단다. 이상은 우리가 사는 실제 세상과 달라서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모든 게 완벽한 세상’을 뜻해. 쉽게 말해서 지금 여기가 실제라면 신이 사는 천국은 이상인 셈이지. 도형을 그릴 때에도 마찬가지 인데, 원이나 정사각형, 직선 등은 어디 한군데 삐뚤어진 곳 없이 완벽하고 깨끗한 모습을 하고 있지? 신이 그린 것처럼 똑바른 그런 도형들을 이상적이라고 생각한 거야. 아이가 그린 것처럼 불규칙적이고 구불구불한 선이나 불룩하게 배 나온 타원은 그래서 이상적이라기 보다는 인간적이고 자연스럽다고 보는 거지.
토토: 똑바르지 않은 것이 인간적이란 거군요?
B: 그렇지. 사람의 몸을 봐도 직각이나 완벽한 원을 이루는 곳은 어디에도 없잖니? 오목하게 들어갔다가, 주름이 짜글짜글 잡혔다가, 뼈가 툭 툭 튀어나오는 것이 보통 사람의 몸이란다.
G: 자 이제 다 같이 실내로 들어가 볼까요? 바닥과 천장을 보면 건물이 타원 모양으로 생긴 것을 알 수 있는데요, 이 시대의 다른 건축가들이 온전한 타원을 쓴 것과 다르게 보로미니는 타원에 다시 한 번 변형을 가해서 표주박 같은 모양을 만들었습니다. 공간이 길쭉하고 들쑥날쑥한 것이 묘한 긴장을 주는 것 같지 않나요? 이 성당은 ‘맨발의 삼위일체 수도회’를 위해 지어졌는데 그들은 화려한 장식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안에 들어와 보면 우선 조각 없이 깨끗한 벽면이 더욱 눈에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토토: 우와. 하늘에는 십자가가 날아다녀요.
B: 정말 너무 환상적이구나. 육각형들 사이사이에 십자가들이 채워져 있네. 꼭대기에 갈수록 도형들의 크기가 훨씬 작아져서 그런지 돔의 높이가 실제보다 더 높은 것 같아.
G: 자. 그럼 이제 개인적인 감상이 끝났으면 문제를 내도록 하겠습니다. 모두들 주목해 주세요. 프란체스코 보로미니의 대표작인 산 카를로 알레 콰트로 폰타네는 위로 솟구치는 듯한 모습과 안팎으로 요동치는 벽면을 통해 신을 향한 열정적인 마음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 성당의 이름을 해석하면 구체적으로 카를로 성인을 위해 바친 장소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요, 그 밖에도 성당의 이름은 이 곳 위치를 알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네 개의 이것이 있는 곳에 위치한 성당이라는 뜻에서 콰트로 폰타네란 이름이 붙었는데요 과연 이것은 무엇일까요?
토토: 저요! 제가 알아요!
B: 오. 토토. 이 문제는 이태리에서 태어난 너를 위한 문제로구나.
토토: 답은 분수입니다.
G: 네. 정답입니다. 콰트로는 숫자 4를 의미하고 폰타네는 분수라는 뜻입니다. 성당은 교차로의 한 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각각의 모서리를 보면 작은 분수들이 조각되어 있는 걸 보실 수 있습니다. 언뜻 길고 어려워 보이는 이름은 바로 장소를 설명하는 단서를 포함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토토군은 총 세 문제를 맞춰 선두권에 진입하였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소쇄원
아이2: 우와~ 영화에서 말고 실제로 이렇게 높은 대나무들을 보긴 처음이에요.
어른: 쭉쭉 뻗은 나무들이 만들어주는 그늘 덕분에 아주 시원하지 않니? 동양의 정서를 대표하는 풍경이기 때문에 네 말대로 대나무들은 영화에 자주 등장하곤 하지. 그런데 이 숲길은 대나무가 빼곡해 특별하기도 하지만 여기서부터가 소쇄원의 영역을 알리는 역할을 한단다.
아이1: 하지만 아직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걸요?
어른: 응. 그렇지. 우리가 사는 바깥 세계에서의 복잡함을 잊고 깨끗한 마음으로 소쇄원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긴 숲길을 걸어야 하는 준비과정이 필요하단다. 이 대나무들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자연의 세계로 서서히 우리를 안내하는 다리인 셈이지.
(갑자기 고양이가 먼저 달려 나간다.)
아이1: 앗! 시자! 혼자 가면 안 돼. 이런 빠르기도 하지.
아이2: 벌써 사라져 버렸어요.
어른: 괜찮아. 먼저 가서 쉬고 있겠지. 우리도 이제 거의 다 왔단다.
아이1: 정말요? 하지만 입구를 지나오지도 않았는데요?
어른: 응. 그게 소쇄원의 가장 큰 묘미 중의 하나란다. 저기 끊어진 담장이 보이지? 저 담장의 좌측으로 가면 소쇄원의 내부로 들어가는 거고 우측으로 가면 산길을 주욱 오르는 거야.
아이2: 큰 기대를 하고 온 사람들은 실망하겠는걸요?
어른: 여기서 부터가 소쇄원이요라고 엄격하게 정해놓은 것 보다 이렇게 대나무 숲길을 건너다가 자연스럽게 진입하는 방식에서 우리 선조들이 자연을 대하는 태도와 이를 건축에 반영하는데 있어 뛰어난 감각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우리 조상들은 과장되거나 꾸미는 것을 사양하고 자연과 자연스럽게 하나가 되길 바랬거든.
아이1: 자연과 자연스럽게라구요? 흠. 알듯 말듯 하네요.
(대봉대에 한가로이 누워있는 시자를 발견한다.)
아이2: 앗. 저기 시자가 누워있다.
아이1: 얌체같이 혼자만 편하게 드러누워 있다니.
어른: 이거 시자가 제대로 쉴 곳을 찾았구나. 여기는 대봉대(待鳳臺)라고 하는 작은 정자인데 주로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만든 장소야. 이름을 풀이하자면 전설의 동물인 봉황새를 기다린다는 의미인데 예로부터 봉황은 좋은 소식을 가져온다고 믿었거든. 봉황이 둥지를 틀고 산다는 벽오동나무와 열매를 먹는다는 대나무를 주변에 심었으니 손님을 봉황같이 여기고 귀하게 맞이하려는 세심한 배려가 느껴지지 않니?
아이1: 하지만 지금은 시자가 누워있으니 고양이 묘(猫)를 따서 대묘대라고 불러야겠네요.
어른: 하하. 그렇구나. 게다가 소쇄원 중앙을 가로질러 흐르는 계곡물을 끌어다 만든 연못에는 손님과 나누어 먹기 위해 물고기를 풀어 놓았다하니 시자가 이 장소를 탐내는 게 어쩌면 당연하게 생각되는구나.
아이2: 여기 쓰여 있는 한자는 어떻게 읽는 거죠?
어른: 응. 그건 애양단(愛陽壇)이라고 읽는 거란다. 이 ㄱ자로 꺾인 담장으로 둘러싸인 공간을 말하는 건데 햇살이 머물러 사시사철 따뜻하라는 마음과 함께 부모에 대한 지극한 효심이 녹아 있는 곳이지.
아이2: 누구의 부모인데요?
어른: 저런. 그러고 보니 정작 소쇄원을 만든 사람에 대한 얘기를 빼먹었구나. 소박하고 포근한 풍경에 취해 나도 모르게 내 역할을 까먹었었네. 그러기 전에 우리 다리를 건너서 저기 보이는 별당에서 얘기를 이어가보는 게 어때? 저기가 바로 이 정원의 사랑채로서 글도 읽고 시도 읊으며 학문을 하던 곳이거든.
(이동 중 담벼락 아래에 난 구멍으로 개울이 흐르는 것을 발견한다.)
아이1: 어? 담 밑이 뚫려 있어요.
아이2: 뭔가 불안해 보이는데 임시로 돌을 쌓아놓은 건가요?
어른: 아니야. 그렇지 않아. 산 북쪽에서 흐르는 물이 담장 밑을 통과해 자연스럽게 소쇄원 중심을 지나갈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수문이야. 제각각으로 생긴 돌을 괴어 인공적인 느낌을 최대한 감추려 하였고 보기엔 저래도 500년 동안 아무 탈 없이 제 역할을 하고 있단다.
아이1: 에에? 500년이나요?
어른: 행여 돌이 넘어진대도 '허허. 다시 쌓으면 되지'하고 가볍게 여기시지 않았을까? 어차피 자연이란 세월이 흐르면서 움직이거나 사라지기도 하면서 계속 변해가는 거잖아. 물길이 거세어져 돌이 쓰러진다면 그것도 자연이 준 운명인 셈이지.
아이2: 그게 자연에 순응한다는 동양적 생각인가요?
어른: 응. 앞으로 아시아의 다른 건축들을 보면 알겠지만 특히 한국적인 경우에서 더 잘 읽을 수 있단다.
(광풍각에서)
어른: 자~ 우리가 앉아 있는 이 곳은 광풍각이라는 곳이고 저 위로 보이는 건물은 제월당이라고 한단다. 광풍각이 방문객들을 위한 곳이라면 제월당은 주인이 사는 집이야. 이전에 배웠듯 각각의 건물은 규모로 구분할 수 있는데 광풍각은 정면 3칸, 측면 3칸이고 제월당은 정면 3칸에 측면 1칸으로 조금 작아. 둘 다 팔작지붕을 얹었고 온돌바닥을 갖추어 겨울에도 제법 따뜻하게 지낼 수 있게 했지.
아이1: 그럼 여기서 계속 사람이 살았던 건가요?
어른: 그런 건 아니고 이런 곳을 보통 별서라고 하거든? 별서라는 것은 거주 목적의 집 근처에 지은 일종의 별장이나 마찬가지인데 특별히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곳에 위치하는 경우에는 별서라 부른단다. 그러니 출퇴근 하는 일종의 야외 공부방이라고 할 수 있지.
아이2: 하지만 정원이라고 했잖아요? 정원은 나무와 꽃을 가꾸기 위한 곳 아닌가요?
어른: 응. 물론 이 곳에서도 지금 보이듯이 여러가지 나무와 꽃이 한데 어우러져 있고 이 모든 것들은 다 위치와 종류에 따라 제각각의 의미를 담고 있단다. 철학적으로 가꾼 정원이랄까? 그런데 보통 우리는 이 곳을 정원이라고 얘기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소쇄원은 원림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아.
아이1: 원님이요?
어른: 원님이 아니고 원림(園林). 정원이 주택들 가운데 인위적으로 동산의 분위기를 연출한 것이라면 원림은 동산과 숲의 자연 풍경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내부에 정자나 집을 배치한 것을 뜻해. 게다가 정원은 식민지 시대에 일본에서 들여온 개념이라 우리식으로 얘기하자면 원림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단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원림을 만든 사람은 양산보(1503~1557)라는 선비인데 그의 호가 소쇄옹인 까닭에 소쇄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어. 소쇄(瀟灑)는 시원하고 깨끗하다는 뜻이 있거든. 대나무 숲과 개울가에서 나는 소리를 들어보면 잡생각이 사라지고 기분이 절로 상쾌해지지 않니?
아이1: 쿨....
어른: 얘는 너무 편안한지 벌써 잠이 들었네. 하긴 시내에서 꽤 떨어진 곳까지 왔으니 무리도 아니지.
양산보는 너희들보다 조금 더 컸던 열다섯이 되던 해 정암 조광조의 제자로 들어갔어. 조광조는 당시에 곧은 성격과 바른 품성으로 사림들의 지지를 얻고 있었던 학자였거든. 그런데 이를 시기하던 세력이 꾀를 부려서 결국 임금이 하사한 사약을 먹을 수 밖에 없게 되었지. 그때 양산보는 겨우 열일곱 이었는데 스승의 억울한 죽음으로 부터 큰 충격을 받았던 것 같아. 모름지기 사람은 때를 잘 만나지 않으면 그 큰 뜻을 펼치지 못한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속세와 인연을 끊고 고향에 내려와 일찌감치 여생을 보낼 장소를 만들게 된 거란다.
아이2: 그럼 십대 때부터 이런 곳을 만들기 시작한 거에요?
어른: 본격적으로 원림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삼십대였지만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은 이십대부터 그에 대한 꿈을 조금씩 키워갔었던 모양이야. 그리고 평생을 소쇄원에서 공부하는 데 보냈으니까 돈이나 권력에 대한 욕심 없이 참 바람직한 삶을 살다 가신 분이였지.
아이2: 에이. 그래도 이 산 속에서 혼자 있으려면 심심했겠어요.
어른: 그래서 다른 선비들이 자주 찾아와서 공부도 하고 휴식도 취하라고 광풍각이며 대봉대며 마련한 것이 아니겠니? 덕분에 여러 사람들과 친분을 쌓을 수 있었고 이 곳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글귀와 시가 많이 남아 있단다.
아이2: 그래서 이렇게 작은 장소에 대해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거군요?
어른: 대표적으로 양산보의 친척인 김인후라는 사람이 48영 한시를 써서 소쇄원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렸지. 원래는 싯구를 담장에 걸었는데 지금은 제월당에 가면 볼 수 있어.
아이2: 영이 뭐죠? young?
어른: 영(詠)은 노래하다 또는 시를 짓다라는 뜻인데 48영이라고 하면 마흔여덟개의 시를 의미하지.
아이2: 와. 정말 많이도 썼네요.
어른: 응. 그래서 지금 우리가 그때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와 생각들을 짐작하는 자료로 쓰이지.
아이2: 소쇄원에 대해 모르는게 없겠어요.
어른: 하하. 꼭 그렇지만도 않아. 옛부터 우리 조상들은 많은 의미와 철학을 담아서 터전을 만들었거든. 여전히 풀리지 않은 비밀들이 남아 있단다.
아이2: 그게 뭔데요?
어른: 여기 소쇄원도를 보면 개울 남쪽으로 인공 연못이 두개가 있지?
아이2: 예. 하나는 대봉대 옆에 있는 거 아니었어요?
어른: 응. 그런데 그 연못을 수직으로 마주보고 있는 건물은 각각 광풍각과 제월당이거든. 그 연못의 너비와 별당의 바닥 면적이 서로 약속한 듯이 비슷하단다.
아이2: 그게 무슨 의미죠?
어른: 글쎄. 아직 특별한 의미를 찾지는 못했지만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그 위치나 크기가 예사롭지 않게 보이나봐. 언젠가 그 뜻을 헤아릴 날도 오겠지.
아이2: 서양 건축에서 흔히 나타나는 상징성과 스케일이 여기에도 있군요.
어른: 그걸 기억하고 있다니. 정말 똑똑한데? 건축 안에 많은 이야기를 담았다는 사실은 동서양이 다를 바 없어.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그 뜻을 일일이 찾아내고 해석하는 것 보다 이렇게 한가로이 마루에 앉아서 자연과 하나 되길 바랬던 소쇄옹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 우선이지 아닐까? 그러니까 오늘은 그냥 한껏 쉬다가 가자꾸나.
하늘을닮은신전, 판테온
판테온이라는 이름은 '모든'을 뜻하는 '판(pan)'과 '신'을 가리키는 '테온(theon)' 두 단어를 합친 말로 모든 신을 위한 신전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여러 신을 함께 숭배했던 고대 로마인들은 인근지역을 무력으로 정복하더라도 신을 향한 그들의 믿음까지 빼앗지는 않았어요. 다신교 문화를 바탕으로 종교의 다양성을 존중 하다 보니 시간이 갈수록 모시는 신의 숫자는 늘어만 갔고, 30만에 가까울 정도로 많은 신이 존재하다보니 그리스의 경우처럼 특정 신 한 명을 위해 신전을 세울 수 없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결국 누구하나 섭섭하지 않게 모든 신들을 아우르는 건물을 짓게 된 데에는 이러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죠.
로톤다광장에는 판테온을 보러온 관광객들로 가득합니다. 로마에 가면 꼭 방문해야 한다고 안내 책자에서 강조하는 것에 비해 밖에서 보이는 건물은 무척이나 초라하고 낡았습니다. 교회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그 흔한 조각 한 점 달려있지 않고 입구를 떠받치는 16개의 코린트식 기둥에 장식된 잎사귀들은 죄다 벌레 먹은 듯 끝이 닳아 있습니다. 국가의 보물이자 신성한 신전은 명성에 걸맞지 않게 방문객들의 소란스런 왕래에도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스고전 양식으로 구성된 입구 정면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흔적이란 M.AGRIPPA.L.F.COS.TERTIVM.FECIT라고 쓰인 라틴어뿐인데 이는 루시우스의 아들인 마르쿠스 아그리빠가 세 번째 집정관 임기에 만들었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현재의 판테온은 아그리빠라는 사람이 만든 것일까요? 그 역사적 기원에 대해서 잠시 짚어보기로 하겠습니다.
아그리빠는 황제 카이사르가 양자인 옥타비아누스의 부족한 면을 채워주기 위해 발탁한 시골출신의 병사였습니다. 카이사르가 기대한 대로 아그리빠는 군인과 정치가로서의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고 옥타비아누스가 훗날 로마제국의 황제가 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가난한 시골 출신에서 제국의 2인자가 된 아그리빠는 항상 카이사르와 신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았고 기원전 25년에 판테온을 지어 모든 영광을 고인이 된 황제 카이사르와 자신을 지켜준 로마의 모든 신들에게 바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사각형이었던 최초의 판테온은 불행하게도 기원후 80년에 대화재로 불타 버리고도 미티아누스에 의해 다시 지어진 건물은 110년에 벼락을 맞고 보수가 불가능할 정도로 훼손되었습니다. 결국 118년 하드리아누스황제에 의해 새롭게 계획되어 128년에 공사를 마친 세 번째 건물이 현재 우리가 보는 판테온인 것 입니다. 보통은 건축물에 대해서 건축가의 이름이 기록되는데 비해 어디에서도 건축가를 찾아 볼 수 없고 오직 하드리아누스황제의 이름만 남아있는 이유는 왜일까요? 그리고 아그리빠의 이름을 건물에 새겼던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하드리아누스는 다른 황제와 달리 건축과 도시계획에 관심이 많았고 예술적 재능이 풍부했던 까닭에 건물 형태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공하기도 하였습니다. 판테온의 경우 역시 기본적인 계획은 황제에 의해 이루어지고 실제 공사에 관한 세부적인 문제들만 건축가들이 관여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스스로의 위대한 창조물을 아그리빠의 공으로 돌린 것은 최초 건설자에 대한 존경심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위대한 황제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아그리빠를 기념함으로써 본인의 정통성을 은근히 강조하려는 정치적인 이유도 담겨 있습니다.
입구에 가까이 갈수록 수 세기에 걸쳐 새겨진 상처들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이집트에서 수입된 붉은 화강암 기둥은 거칠고 색이 바랬으며 발코니 지붕을 덮었다던 청동은 오간 데 없고 새까만 나무 구조가 부끄럽게 속살을 노출 하였습니다. 모든 신들을 위해 봉헌 되었던 신전은 609년 동로마제국의 황제 포카스가 교황 보니파시오 4세에게 소유권을 넘기면서 기독교의 신을 위한 성당으로 한순간에 운명이 뒤바뀝니다. 기독교의 보호 아래 그토록 오랜 세월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외부로 드러난 질 좋은 대리석과 건물 정면을 장식하던 조각들이 약탈당하는 것 까지 막기는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663년 콘스탄티우스황제는 로마를 방문하는 12일 동안 값어치 있는 장식품들과 청동기와를 모두 가져가 버렸고, 17세기 초 교황우르바노 8세는 산탄젤로 성의 방어를 위해 입구 천장을 덮은 청동 25톤을 모두 녹여 대포를 만들었습니다. 햇빛을 반사하며 반짝거리던 화려함은 어느새 콘크리트와 벽돌만 남아 칙칙해졌습니다. 조각들을 매달기 위해 여기저기 구멍이 흉하게 뚫린 페디먼트 밑을 지나 오랜 노력 끝에 복원한 청동 문을 열고 실내로 들어가 봅니다.
아! 하늘을 덮은 거대한 돔 지붕이 만든 실내공간은 정말로 거대하고 경이롭습니다. 지름 43.3m의 공이 들어간다면 바닥에 그 끝이 정확히 맞닿을 정도로 정교하게 짜인 내부는 공학과 수학이 이룩한 건축의 기적입니다. 일반 건물 15층 높이에 달하는 천장에서부터 1층으로 전달되는 콘크리트 무게를 줄이기 위해 아래에서 위로 갈수록 벽의 두께는 얇아지고 재료도 비교적 가벼운 돌들로 이루어졌습니다. 단단하고 무거운 석회질로 구성된 1층 벽은 무려 6.2m나 될 정도로 두꺼우니 웬만한 폭탄에도 끄떡없을 것 같네요. 콘크리트가 굳는 속도를 빠르게 하고 무게를 줄이기 위해 사각형 모양으로 촘촘하게 판 벽면은 입체적인 패턴을 이루며 장식적인 효과까지 달성했으니 일석삼조입니다. 이후 모든 돔 구조에 영향을 미치게 된 판테온의 돔은 시작부터 얄미울 정도로 완벽한 모습을 갖추었네요. 유일하게 뚫린 머리꼭대기의 둥근 창을 통과한 강렬한 햇살이 바닥에 눈부신 원을 그려냅니다. 거대한 실내를 가르는 한줄기 빛을 따라 사람들이 서서히 움직이는 모습이 재밌습니다. 실내를 밝히고 공기를 순환시키는 9m 지름의 창은 비가 내리면 더운 실내 공기를 밖으로 뿜어내면서 내부에 떨어지려는 빗물을 밀어 낼 정도로 과학적입니다.
실내에 들어서기까지 앞만 보고 걸었던 사람들은 둥근 창을 보기위해 고개를 들고 한참을 서 있습니다. 고대로마 때부터 사람들은 하늘을 우러러보며 각자의 위대한 신에게 기도를 올렸겠지요. 인간의 시선이 수직을 향하면서 저 하늘 너머 어딘가에 있을 신의 위대함을 실감하게 됩니다. 그래서 판테온의 둥근 지붕은 하늘을 닮은 것 입니다. 하늘은 둥글다는 당시의 생각이 이러한 공간을 만들게 된 이유인 셈이지요. 욕심이 많은 누군가가 사각형문양 가운데 하나씩 달려있던 금장식을 훔쳐가기 전에는 우주에서 빛나는 별들과 같이 신비로운 반짝거림이 하늘 가득했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신의세계가 황홀하게 펼쳐졌으리라 짐작됩니다. 고대그리스는 맑고 온화한 지중해성 기후로 인해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종교의식이 대부분 야외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다보니 신전은 외부를 향해 열려있고 상대적으로 내부공간에 대한 관심은 덜하였습니다. 하지만 로마의 건축은 성당이나 공동목욕장에서 알 수 있듯이 중요한 행위들이 내부에서 일어나며 따라서 어떻게 하면 실내를 더욱 웅장하고 아름답게 만들 수 있을까 생각을 바꾸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의 의식에 따라 건축공간이 역전되는 큰 변화를 2000년이 지난 지금의 판테온에서도 변함없이 읽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 쓰러져가는 외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장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가치를 인정받아야 하는 것이지요. 르네상스이후로 유명인사들의 무덤으로 사용된 판테온은 비록 신성한 건축으로서의 기능을 잃었지만 그 자체로 신화가 되기에 충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