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한테 왜 그러는 걸까.
이미 오래 전부터 남과 다른 삶을 살기 시작했는데.
자꾸 이러쿵 저러쿵 이래라 저래라.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로쿠르스테스의 침대가 떠오른다.
난 아마 평균 미달일테니 잡아 늘려지겠지.
알랭드보통의 TED 강연을 보고 받았던 위안이
몇 마디 말의 거센 바람 앞에서는 촛불처럼 보잘 것 없었구나.

그 친구는 선물을 고르는 센스가 남달랐다.
주는 선물 족족 그렇게 내 맘에 쏙 들 수가 없었다.
그 중 겨울을 따뜻하게 보낼 수 있는 필수 아이템 장갑은 겨울에도 자전거를 몰아야하는 나에게 너무 귀한 선물이었다.
나는 원래 물건을 잘 잃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다.
핸드폰을 어디 두고 나온 적도 없고, 지갑도 14년째 같은 걸 들고 다닌다.
술 먹고 안경을 잃어버렸을 때에도 부축한 친구가 챙기다가 어디엔가 흘린 것이지 나의 불찰은 아니었다.
그런데 네덜란드에서 잘 쓰던 장갑이 어느날 갑자기 연기처럼 증발했다.
단돈 50센트만 받을 수 있다면 남이 입던 빤쓰도 훔쳐가는 유럽인지라 누군가의 소행으로 핑계를 대보고 싶지만 그렇다고 해도 누군가 마음을 담아 건네 준 선물을 잃어버린 죄책감까지 지울 수는 없었다.
사실을 알고 선물을 준 당사자의 기분은 상했고 나는 계속 미안해 했다.
혹시나 같은 제품이 또 출시되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고 다음 해 겨울 팀버랜드의 매장을 찾았으나 헛수고였다.
결국 그 매장에서 저렴하면서도 맘에 드는 장갑을 샀지만 기능적으로나 심미적으로나 완전한 대체품이 되지 못하였다.
구글에서 아무리 이미지를 뒤져봐도 그런 디자인을 판매했다는 사실조차 없는 듯 아무런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
여전히 네덜란드에서 구입한 장갑을 착용하고 다니지만 올 해 역시 미안한 마음은 가시질 않는다.
그리고 지금의 장갑에는 아무런 애착도 없다.

안고있는 크리스티나의 눈이 살살 감기는 듯 했다.
새로 산 나의 맥북에어 슬리브즈의 따뜻한 감촉을 좋아하는 듯 해서 기꺼이 그녀의 잠자리로 제공하려 했다.
한 손엔 크리스티나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주변을 정리하다가 그만 에스프레소가 담긴 종이컵을 넘어뜨리고 말았다.
물론 컴퓨터 자판 위에 쏟은 건 아니지만 커피는 순식간에 책상 위로 퍼졌고
맥북에어의 바닥에도 어느 정도 묻긴 하였다.
친절한 주변인들의 도움으로 태안 앞바다 기름유출 때 처럼 사태는 금방 해결됐고
컴퓨터가 잘 작동하는 걸로 봐서 내부까지 커피가 흘러들진 않은 것 같지만
한 순간의 부주의로 받은 트라우마에 아직도 모골이 송연하다.
사실 넷북이었으면 그러거나 말거나 했을텐데 애지중지 하는 맥북이다 보니 그동안 커피 마실 때 마다
굉장한 주의를 기울였었다. 게다가 애플케어라는 든든한 구세주까지 있었지만 언제나 사고는 미연에 방지하는 게
최선이다라는 마음가짐으로 주변을 엄격하게 세팅하며 작업해왔다.
텀블러는 항상 책상 가장 멀리에. 그리고 텀블러와 컴퓨터 사이에는 버퍼 역할을 하는 책을 배치... 등등.
며칠 전에는 키스킨을 사러 매장까지 들렀는데 아직 신형 모델에 대해서는 꼭 맞는 스킨이 나오지 않아
불발에 그치고 말았다. 이렇듯 나름 안전을 위한 숨은 노력들이 있어왔는데 고양이 재우려다 다 날려먹을 뻔 하자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이 가장 크게 남았다.
마치 하루 종일 아이 손 꼭 붙잡고 돌아다니다가 폭탄세일에 잠시 한 눈을 판 사이 아이를 잃어버린 엄마의 자괴감.
좋은 물건은 갖고 싶어서 안달이 나다가도 소유하게 되면 그 순간 짐이 되니 난 무소유의 마음과는 거리가 너무 먼 사람이다.
모두가 걱정스런 마음으로 커피 뒷처리를 할 때 크리스티나는 무슨 좋은 구경 났나 싶어 들뜬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었겠지.
너 재울려다 아빠는 피눈물을 쏟을 뻔 하였단다.
이 망할년아.

사람들은 나에게 어떤 기대를 갖고 있는 걸까.
가끔 당신은 좋은 사람이다 라는 얘기를 들을 때 당혹스럽다.
대놓고 아니라고 하기도 그렇고, 더 자세히 알고보면 빈틈도 너무 많고 실망할 구석도 다분한 걸.
나는 대화의 7할이 실 없는 소리이고 욕하기 좋아하고 게으르며 B급 문화를 사랑하는데 말이다.

그래서 나를 좋은 사람이라고 미리부터 선입견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좀처럼 본 모습을 보일 수 없게 된다.
당연히 상대가 여자라면 연애를 할 용기가 생기지 않고.
"자 이제 롤러코스터의 정점에 올라오셨습니다.
남은 것은 시속 120km로 빠르게 추락하는 것 뿐 입니다."

참 미안합니다.
 
요즘 아이들은 예전보다 훨씬 영악하니 이미 중학교에서 벌어지는 일 일 수도 있겠다.
내가 고등학교를 다닐 적. 공부를 등한시하고 노는 친구들은 도시락을 싸오지 않았다.(경험상 일백프로 였다.)
집이 가난해서 못 싸오는 것도 아니고 도시락 따위를 들고 다니면서 아이들이나 여자들 앞에서 가오를 잡기 어렵다는 걸 깨닫고 있었다. 더불어 점심은 매점에서 사 먹으면 된다고 용돈까지 받았을 터이니 그야말로 3년 동안 꾸준한 수입이 되었겠지.
그렇다고 그들이 밥을 굶냐. 그건 또 아니올시다. 희생은 어디까지나 순진한 다수 학생들의 몫이다.

편의상 도시락을 싸오지 않는 집단을 '무도'라고 하자.
2교시나 3교시에 배정된 체육시간은 무도들의 뷔페 날이다. 그들은 수업 중 몰래 교실에 들어와 아이들의 도시락을 하나씩 뒤지며 맛있는 반찬과 밥을 훔쳐먹는다. 한 숟가락씩만 퍼 먹어도 열 명의 도시락이면 이미 만족스런 한 끼 식사는 해결하고 남는다. 십시일반의 아주 잘못된 예가 되겠다.

보통의 경우, 점심시간이 되면 무도들은 어디선가 숟가락만 들고 나타난다.
그리고 교실을 순회하며 아이들의 반찬과 밥을 가져다 먹는다. 학기초에는 아주 작은 예의를 보이며 '한 입만~'이라고 억지 동의를 구하지만 시간이 지나다보면 그런 말도 없이 너무 당연하게 맛있는 것들만 쏙쏙 골라가는 얌체가 된다. 가장 막장인 최종단계에서는 아예 숟가락조차 들고오는 노력을 거부한다. 맨 몸으로 태어나 맨 몸으로 살다 간다는 무소유의 삶인 거냐. 누군가의 숟가락을 뺏어와 게걸스럽게 배를 채운다.

학년을 거듭해 올라가다보면 이런 무도들의 행태가 전염되어 점점 그 규모가 커져만 간다. 평소에 얌전하던 친구들도 어느새 기생체가 되고 도시락을 안 싸 오는 친구들의 수가 과반수를 넘어가 점심시간의 존립 자체가 위협을 받게 된다. 아이들은 어짜피 남의 먹이가 될 거, 어머니께 소세지, 계란말이, 닭강정, 카레 등등의 맛있고 귀한 반찬들을 넣지 말라고 한다. 어머니는 영문도 모른 채 이제 우리 아들이 다 컸다며 콩자반, 도라지, 더덕무침, 시금치, 콩나물, 미역국만 만들어 주신다. 무도들과 담을 쌓고 지내는 모범생의 경우 반찬 뚜껑으로 내용물을 가리고 먹는 방어를 구사해 치사하다는 핀잔을 듣지만 정작 치사하고 부끄러운 게 누군지 서른 넘은 지금쯤은 깨달았을까 모르겠다.

나는 무도들이 너무 싫었다. 주는 거 없이 뺏기만 해서 그렇거니와 최소한의 예의도 갖추지 않는 태도가 마뜩찮았다. 그래도 딴에는 자존심이 있어서 뚜껑을 방패로 사용하진 않았지만 3년 내내 그들을 증오하는 마음까지 누그러뜨릴 수는 없었다.
지금도 여전히 그런 놈들이 싫다. 맛있는 것만 골라 먹으려는 놈들. 자기 이익도 모자라 남의 것 까지 탐하는 놈들. 즐거운 인생에 태클을 거는 놈들. 괜히 가만히 잘 사는 사람까지 전염시키는 놈들. 예의 없는 것들.

그런 인간들을 볼 때 마다 고교시절의 점심시간을 떠올린다.
훔쳐먹거나 뺏어먹고 시원하게 식후땡을 즐기던 녀석들. 그리고 자식이 도시락을 싸 가지 않아도 용돈 줬으니 알아서 먹겠지라고 안심하던 부모들. 무상급식이 꼭 배고픈 사람에게만 이루어져야 하는 게 아님을 이제 알겠는가? 나 강남 노른자 땅, 무균질 8학군 교육을 받고 자랐고 주변에 죄다 잘 사는 친구들 뿐이지만 그네들은 당시에 미제 힙합 바지를 사 입을 돈은 있어도 도시락 가져오는 형편은 아니었다는 점. 정치인들은 잘 알아줬음 싶다.
요절복통의 '요절'이 그 '요절'이 아니더라.
어제 오전에 맥북 에어를 받았다.
나도 남들처럼 나에게 주는 선물이라며 그럴싸한 변명을 달고 싶지만
알고보면 넷북, psp, 게임, 심지어 한 번도 쓰지 않은 가사도구까지 중고장터에 내 놓았고
친구 Y의 학번을 빌려 14%의 학생할인을 받아 겨우 부담을 줄일 수 있었던 아슬아슬한 구매였다.

그동안 맥 노트북을 쓰는 사람들을 보면서 조명이 들어오는 사과 마크를 얼마나 부러워했으며
자석이 달려서 갖다 대기만 하면 척 하고 달라 붙는 전원 케이블에 얼마나 충격을 받았었는지
맥에서는 캐드와 라이노가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바이오를 사야했던 유학 시절이 떠오른다.
결국 이런 저런 사정으로 설계를 포기하고 글을 쓰기로 하면서 나는 윈도우에서 벗어났고
아이맥, 아이폰, 아이팟 그리고 이제 맥북을 소유하게 되었으니 이만하면 내가 포기한 것들에 대해 괜찮은 보상이 아닌가 싶다. (물론 농담이지만)

사람의 의지나 실력이 문제이지 도구가 무슨 소용이냐만은
그래도 이 컴퓨터로 책을 열 권은 찍어내야 되지 않겠냐며 맥북 에어는 전혀 동의하지 않는 암묵적 계약을 맺어버렸다.

 

오늘 맥북에어 배송했다는 메일이 왔다.
저번 주 금요일에 받을 수도 있겠다는 판매자의 빈 말에 원기옥만한 기대를 한 내가 잘못이지.
아마도 수요일 쯤 받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오늘은 한 번 더 미쳐보자는 심정으로 93유로짜리 슬리브즈를 오스트리아로부터 주문했다.
괜히 어정쩡한 가격으로 맘에 안 드는 거 사느니 조금 무리하더라도 오래 애착을 가질 수 있는 걸 택했다.
그게 내가 정한 나름의 쇼핑 룰.
게다가 어짜피 한국엔 13인치 에어용 슬리브즈는 구할 수도 없으니까 아주 무리한 결정은 아니다.
넷북과 안 쓰는 psp까지 괜찮은 가격에 팔 수 있었으니 조금 홀가분해 진 것도 있고.
하여튼 그동안 물건 검색하고 사고 팔고 하는데 바뻤다.
다시 책 작업 돌입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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