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아이들은 예전보다 훨씬 영악하니 이미 중학교에서 벌어지는 일 일 수도 있겠다.
내가 고등학교를 다닐 적. 공부를 등한시하고 노는 친구들은 도시락을 싸오지 않았다.(경험상 일백프로 였다.)
집이 가난해서 못 싸오는 것도 아니고 도시락 따위를 들고 다니면서 아이들이나 여자들 앞에서 가오를 잡기 어렵다는 걸 깨닫고 있었다. 더불어 점심은 매점에서 사 먹으면 된다고 용돈까지 받았을 터이니 그야말로 3년 동안 꾸준한 수입이 되었겠지.
그렇다고 그들이 밥을 굶냐. 그건 또 아니올시다. 희생은 어디까지나 순진한 다수 학생들의 몫이다.
편의상 도시락을 싸오지 않는 집단을 '무도'라고 하자.
2교시나 3교시에 배정된 체육시간은 무도들의 뷔페 날이다. 그들은 수업 중 몰래 교실에 들어와 아이들의 도시락을 하나씩 뒤지며 맛있는 반찬과 밥을 훔쳐먹는다. 한 숟가락씩만 퍼 먹어도 열 명의 도시락이면 이미 만족스런 한 끼 식사는 해결하고 남는다. 십시일반의 아주 잘못된 예가 되겠다.
보통의 경우, 점심시간이 되면 무도들은 어디선가 숟가락만 들고 나타난다.
그리고 교실을 순회하며 아이들의 반찬과 밥을 가져다 먹는다. 학기초에는 아주 작은 예의를 보이며 '한 입만~'이라고 억지 동의를 구하지만 시간이 지나다보면 그런 말도 없이 너무 당연하게 맛있는 것들만 쏙쏙 골라가는 얌체가 된다. 가장 막장인 최종단계에서는 아예 숟가락조차 들고오는 노력을 거부한다. 맨 몸으로 태어나 맨 몸으로 살다 간다는 무소유의 삶인 거냐. 누군가의 숟가락을 뺏어와 게걸스럽게 배를 채운다.
학년을 거듭해 올라가다보면 이런 무도들의 행태가 전염되어 점점 그 규모가 커져만 간다. 평소에 얌전하던 친구들도 어느새 기생체가 되고 도시락을 안 싸 오는 친구들의 수가 과반수를 넘어가 점심시간의 존립 자체가 위협을 받게 된다. 아이들은 어짜피 남의 먹이가 될 거, 어머니께 소세지, 계란말이, 닭강정, 카레 등등의 맛있고 귀한 반찬들을 넣지 말라고 한다. 어머니는 영문도 모른 채 이제 우리 아들이 다 컸다며 콩자반, 도라지, 더덕무침, 시금치, 콩나물, 미역국만 만들어 주신다. 무도들과 담을 쌓고 지내는 모범생의 경우 반찬 뚜껑으로 내용물을 가리고 먹는 방어를 구사해 치사하다는 핀잔을 듣지만 정작 치사하고 부끄러운 게 누군지 서른 넘은 지금쯤은 깨달았을까 모르겠다.
나는 무도들이 너무 싫었다. 주는 거 없이 뺏기만 해서 그렇거니와 최소한의 예의도 갖추지 않는 태도가 마뜩찮았다. 그래도 딴에는 자존심이 있어서 뚜껑을 방패로 사용하진 않았지만 3년 내내 그들을 증오하는 마음까지 누그러뜨릴 수는 없었다.
지금도 여전히 그런 놈들이 싫다. 맛있는 것만 골라 먹으려는 놈들. 자기 이익도 모자라 남의 것 까지 탐하는 놈들. 즐거운 인생에 태클을 거는 놈들. 괜히 가만히 잘 사는 사람까지 전염시키는 놈들. 예의 없는 것들.
그런 인간들을 볼 때 마다 고교시절의 점심시간을 떠올린다.
훔쳐먹거나 뺏어먹고 시원하게 식후땡을 즐기던 녀석들. 그리고 자식이 도시락을 싸 가지 않아도 용돈 줬으니 알아서 먹겠지라고 안심하던 부모들. 무상급식이 꼭 배고픈 사람에게만 이루어져야 하는 게 아님을 이제 알겠는가? 나 강남 노른자 땅, 무균질 8학군 교육을 받고 자랐고 주변에 죄다 잘 사는 친구들 뿐이지만 그네들은 당시에 미제 힙합 바지를 사 입을 돈은 있어도 도시락 가져오는 형편은 아니었다는 점. 정치인들은 잘 알아줬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