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인과의 티타임을 앞둔 오후.
밖을 나오니 성큼 다가온 여름이 맞이했다.
그럴 줄 알고 아끼는 파인애플 셔츠를 입었다.
방 정리 중 나온 쓰레기도 분리수거했다.
그간 무슨 대단한 미련이었는지 버리지 않았던 애플 제품의 박스들을 자루에 후두둑 떨어뜨렸다.
디스크 조각 모음을 마친 사람마냥 산뜻한 마음으로 발을 내딛었다.
목적지는 지하철로도 얼마 안 됐다.
그런데 갑자기 또 생각났다.
잠을 못 자면 공황이 온다는.
물론 그 말을 방송에서 한 의학 박사는 그러니 잠을 충분히 잘 자두라는 얘기였겠지만
현대인에게, 특히 매일이 불안인 사람에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당연히 충분히 못 잤고, 그분의 얘기가 일종의 암시로 마음에 박혔다.
세로토닌 분비를 차단하는 신경 물질은 열심히 생산되고
고층 빌딩 옥상의 항공 장애 표시등처럼 특별한 조건이 아니더라도 내내 빨간 빛이 깜빡거렸다.
아니다다를까 지하철 두 정거장을 못 가 결국 공황이 터졌다.
거기서 그냥 잠깐 딴 생각하며 회피했으면 좋은 결과를 맞이했을 텐데.
근데 그러지 못했다. 문이 닫히기 직전 빠져나왔다. -> 1 down
오늘도 패배했구나. 난 왜 매번 패배인가 자괴감이 왔다. -> 2 down
어려운 사람을 만나는데 지각할 것 같다는 우려를 한다. -> K.O.
불안에 사로잡히니 과거 중 최악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도 지하철이었다.
그때처럼 되면 어쩌지, 일종의 사망 플래그 같은 생각을 했다.
약효가 돌기를 바라며 큰 언주역을 위로 아래로 돌아다녔다.
누가봐도 수상할 모습이었다.
좀처럼 나아지질 않아 약을 또 먹었다.
약을 먹었지만 약효가 나타나기까지 대략 20분이 걸리니 그때까지 어쩌지?
무장해제된 사람의 심정으로 더 큰 혼란이 왔다.
마스크 착용으로 인해 걸리적거리는 호흡, 열차가 오가고, 사람들이 바쁘게 다니는
도시의 건조한 소리와 시각적 자극에 힘들어 했다.
결국 걸어가자는 생각에 역 밖으로 나왔다.
열린 하늘을 보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였다.
이렇게 집에 오는 데까지 1시간 45분을 허비했다.
공황이란 정말 뭘까.
비슷한 듯 다양한 면상을 하고 있다.
"그때 그놈인 줄 알았지? 사실 다른 고문관이고 이번엔 내 스타일을 맛 봐라."
공황을 달리 표현할 말들은 생각날 때마다 적어봐야겠다.
그래봐야 경험할 때의 고통을 온전히 전달하긴 어렵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