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시무시한 꿈을 꾸었던 하루.
그런데 현실은 더 무서웠다.
눈물도 들어가버린 자괴감 최대치의 기분.
토요일 새벽 3시. 혜화동에서 반포까지 달리는 택시 안.
바깥에는 인적 드물고. 차 안에서는 정적만 흘렀다.
왜 사는지 모르겠는 요즘.
당분간은 그 이유를 찾아야겠다.
무엇도 나를 고무시키지 못하는 지독한 불능의 시기.
trivial
불능
숨 고르기
두 달간의 금주를 마치고 다시 술을 마시면 신나는 일상이 더해질 거라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 못하다. 더 남들의 관심을 갈구하고, 그래서 더 외롭고 우울하다. 몸도 피곤하니 술 마신 다음 날은 제대로 일도 못하고.
일단은 자신의 부족함을 제대로 바라 볼 필요가 있다. 술은 되도록 멀리하여 애써 좋지 않은 자신의 모습을 끌어내려하지 말자. 가지에 간신히 매달린 잎 같은 처지를 최대한 문제 없이 이끌어보도록 하는 게 일종의 수양이 되지 않을까. 바람에 흔들리더라도 방향을 잘 타서 끊어지지 않게.
스스로 몰아세운 위기의 상황이지만, 그래도 지나친 바보는 아니었다는 믿음으로 잘 극복해보자.
영광
"감독님의 영광의 순간은 언제였나요. 저는 지금입니다."
영광의 순간을 제 스스로 만들기 어려운 나이를 사는 사람들.
그들의 욕망을 대리 충족해주는 스타들.
스포츠가 국뽕에 빠지기 쉬운 이유.
80년대의 3S 정책이 국민들로 하여금 정치에 대한 관심을 돌리는 것이기도 하지만
쌓여가는 불만의 찌꺼기를 연소하기 위함도 있다.
신분 격차가 심해질수록, 각자가 오를 수 있는 정상의 한계치가 높아질수록,
만족을 느끼는 사람들은 적고, 상대적 박탈감은 커진다.
적당함에도 항상 갈증 상태인 사람들은 대규모의 커다란 이벤트에만 기쁨을 느끼고
제 스스로, 매일매일의 작고 꾸준한 노력으로 성취를 이를 수 없는 사람들은
금세 지치고 낙담할 수 밖에 없다.
손 쉽게 얻는 '좋아요'
타고난 소득 만으로도 충분히 들을 수 있는 '예뻐요'
집의 위치, 자동차의 브랜드 만으로 인생 전반을 치장할 수 있는 세태.
일회성의 평가에 길들여지고, 탐닉하게 된다.
블로거, 평가단, 네티즌, 인플루언서 등등 별 것도 아닌 지위를 내세우고
사장님, 사모님, 회장님, 위원님, 대표님.
실속 없는 위신을 떨치며 오늘도 너른 밭 대신 아슬아슬한 경사에서 발을 동동 구른다.
20180816
시간이 많을 때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하는데 잡념과 혼란만 가득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분명 바빠지면 오늘날의 복잡한 심경을 그리워하겠지.
180815
sns 어디에서도 안주할 수 없네. 야박한 삶이여.
20180807
가슴이 아프다.
가슴이 아프고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을 느낀다.
어째서 삶은 이리도 고독한가.
잘 모르겠다
한동안 가장 많이 든 생각은 잘 모르겠다는 것.
어찌 이리 확신할 게 하나도 없을까.
특히나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나의 상황에
실상 이래서는 안 되지 않는가 싶은 당의와 더불어
한없이 작아져만 간다.
유일하게 분명한 점이라면
그래서 종잡을 수 없이 널뛰는 심경과
끝을 알 수 없는 우울.
누구와도 당장 멱살을 잡을 수 있고
누구와도 뜨겁게 사랑을 할 수 있을 법 한
위험한 나날들.
외로움
폐소 공포증은 내가 외부와 물리적으로 차단되었다는 공포.
광장 공포증은 사람들간의 약속된 결속에서 추방된 후, 방향을 잃고 영원히 헤맬 것 같은 공포.
어쨌든 둘 다 세상에 나 홀로라는 감각이 주요하게 작용.
지독한 외로움은 공황을 일으키고, 공황은 다시 자신을 가두고 외로운 상태를 자처하는 순환.
하루키
아직 하루키의 소설을 반도 못 읽었지만,
그의 비슷비슷한 컨셉에 슬슬 질려가다가
문득 이러한 특성도 일본성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싶었다.
마치 이치로가 매일 동일한 일상을 편집증적으로 반복하듯,
항상 그 자신은 정해진 일과대로 하루를 소화하고,
그저 같은 호흡으로 달리다보면 결승에 다다르는 마라톤처럼,
그는 우승이나 수상 같은 것을 노리지 않고
묵묵히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일을 반복하는 것 뿐.
어쩌면 그에게 소설은 또 하나의 스포츠가 아닐까.
이제 지루해, 라고 얘기하는 것은
그가 가진 태도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참신하고 기가막힌 창작을 넘어,
세월의 더께와 함께 적층되는 대지처럼,
언제가 그의 마지막 글이 발표되었을 때 전체 책을 한 덩어리로 놓고 갈랐을 때
어떤 단면이 그려졌는가를 보고싶다.
그리고 일상에 충실한 모두가 하루키의 소설이다.
잘 다려진 옷을 입고 매일 조그만 가게에서 기름에서 튀김을 건지는 요리사와,
고급 부티크 정문에서 정자세를 일관하는 경비원과,
갤러리의 텅 빈 공간에서 허공을 응시하는 관리자들이 그렇듯.
새 것 증후군
아직 물건이 새 것의 냄새를 풀풀 풍길 때 만큼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시기는 없다.
새 구두를 신으면 누군가에게 잘 밟히고, 새 옷을 입으면 어디에선가 이상한 기름 때가 묻고,
새 노트북을 사면 커피를 엎지를 확률이 비약적으로 증가한다.
카메라를 의식하지 말라고 하면 더 얼굴이 굳어지는 것처럼
새 물건을 두르고 외출을 하면 평소와 다른 긴장감을 냄새 맡고
잡스런 불행들이 몰려오기 마련이다.
새 물건에 대한 설레임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오감이 예민하게 확장되어 세상을 느끼는 정도가 확연히 차이 난다.
'아, 세상이 이렇게나 위험한 요소들로 촘촘하구나' 다시 보게 된다.
하물며 물건을 사도 그럴 지인데,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존재가 곁에 생긴다면
삶은 한편 얼마나 불안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