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이 아프다.
가슴이 아프고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을 느낀다.
어째서 삶은 이리도 고독한가.

한동안 가장 많이 든 생각은 잘 모르겠다는 것.
어찌 이리 확신할 게 하나도 없을까.
특히나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나의 상황에
실상 이래서는 안 되지 않는가 싶은 당의와 더불어
한없이 작아져만 간다.

유일하게 분명한 점이라면
그래서 종잡을 수 없이 널뛰는 심경과
끝을 알 수 없는 우울.

누구와도 당장 멱살을 잡을 수 있고
누구와도 뜨겁게 사랑을 할 수 있을 법 한
위험한 나날들.

폐소 공포증은 내가 외부와 물리적으로 차단되었다는 공포.

광장 공포증은 사람들간의 약속된 결속에서 추방된 후, 방향을 잃고 영원히 헤맬 것 같은 공포.

어쨌든 둘 다 세상에 나 홀로라는 감각이 주요하게 작용.

지독한 외로움은 공황을 일으키고, 공황은 다시 자신을 가두고 외로운 상태를 자처하는 순환.

아직 하루키의 소설을 반도 못 읽었지만, 

그의 비슷비슷한 컨셉에 슬슬 질려가다가

문득 이러한 특성도 일본성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싶었다.

마치 이치로가 매일 동일한 일상을 편집증적으로 반복하듯,

항상 그 자신은 정해진 일과대로 하루를 소화하고,

그저 같은 호흡으로 달리다보면 결승에 다다르는 마라톤처럼,

그는 우승이나 수상 같은 것을 노리지 않고

묵묵히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일을 반복하는 것 뿐.

어쩌면 그에게 소설은 또 하나의 스포츠가 아닐까.

이제 지루해, 라고 얘기하는 것은 

그가 가진 태도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참신하고 기가막힌 창작을 넘어, 

세월의 더께와 함께 적층되는 대지처럼,

언제가 그의 마지막 글이 발표되었을 때 전체 책을 한 덩어리로 놓고 갈랐을 때

어떤 단면이 그려졌는가를 보고싶다.  

그리고 일상에 충실한 모두가 하루키의 소설이다.

잘 다려진 옷을 입고 매일 조그만 가게에서 기름에서 튀김을 건지는 요리사와,

고급 부티크 정문에서 정자세를 일관하는 경비원과,

갤러리의 텅 빈 공간에서 허공을 응시하는 관리자들이 그렇듯.


아직 물건이 새 것의 냄새를 풀풀 풍길 때 만큼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시기는 없다.

새 구두를 신으면 누군가에게 잘 밟히고, 새 옷을 입으면 어디에선가 이상한 기름 때가 묻고,

새 노트북을 사면 커피를 엎지를 확률이 비약적으로 증가한다.

카메라를 의식하지 말라고 하면 더 얼굴이 굳어지는 것처럼

새 물건을 두르고 외출을 하면 평소와 다른 긴장감을 냄새 맡고

잡스런 불행들이 몰려오기 마련이다.

새 물건에 대한 설레임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오감이 예민하게 확장되어 세상을 느끼는 정도가 확연히 차이 난다.

'아, 세상이 이렇게나 위험한 요소들로 촘촘하구나' 다시 보게 된다.

하물며 물건을 사도 그럴 지인데,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존재가 곁에 생긴다면

삶은 한편 얼마나 불안할 것인가.

이번 달에는 쇼핑을 무척 많이 하였다.

세인트 제임스 매장에 들렀다가 그네들이 수입한 일본산 린넨 바지도 확 지르고,

애슝 작가의 원화도 구입하였다.

난생 처음 누군가의 그림을 돈 주고 산 것이다.

인터넷으로 세인트 제임스 티와 이솝 손 세정제, 세안제를 질렀다.

그나마 직구 최저가로 구매하는 노력 정도는 보였다.

문스콜라보에서 10시부터 세일이 있어서 수강 신청 하는 대학생의 심정으로 기다리고 있다가

순발력을 발휘하여 발뮤다 에어엔진 필터를 할인가로 두 개나 주문했다.

세일이라던가, 카드 청구할인이라던가, 하나 남은 사이즈는 구매자의 마음을 가만 두질 않는다.


어쨌든 바지는 생각했던 것보다 사이즈도 잘 맞고 품질이 만족스럽다.

세인트 제임스 티셔츠는 사이즈 고민이 있었는데 역시나 잘 선택했다.

이솝 손 세정제는 내가 굉장히 부유한 삶을 산다는 기쁨을 주고,

어차피 오래 쓰는 용량이라면 이 정도 지출은 정신적으로도 유익하다고 생각했다.

이솝 세안제는 홍콩에서 인천공항에 도착해 지금 택배가 이루어지고 있다.


수 년간 마음에 두었던 크롬 하츠의 악세사리를 오늘 구매하였다.

그 과정은 무척 신속했다.

신세계 본점에 가서 착용해본 뒤, 하나 더 큰 사이즈가 있는 청담 매장으로 직행했다.

8시에 폐점이라 해서 어찌나 서둘렀던지...

살벌한 가격이었지만 그나마 매장의 물품 중에서는 무척 저렴한 축에 속했다.

어쩌면 다음 달 시작하자 마자 귀고리도 구입할 지 모른다.

귀를 뚫지도 않았지만, 예전부터 크롬 하츠 귀고리가 맘에 들었고,

직원이 자꾸 구하기 쉽지 않은 물건이라고 부추겼기 때문이다.

뭐 그런 난데없는 구입을 발단으로 귀를 뚫게 될 지 누가 알겠는가.

어차피 내가 결정하는 나의 삶인데 심사숙고하든, 충동적이든...

나는 반지를 구입한 지금 무척 기분이 좋다.

그간의 우울했던 감정들이 순식간에 휘발되었다.

그러면 된 것 아닌가?


그간 인간 관계로 너무 힘들었다.

많은 사람들의 연락처를 지웠고, sns의 관계를 정리했다.

사람은 내 의지로 어찌할 수 없는 법이다.

이제는 노력하는 관계에도 지쳤다.

기본적으로 지켜야 하는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은 이해할 필요가 없다.

그저 당신이 당신을 사랑하는 만큼, 나도 인간적인 대우를 원할 뿐이다.


나름의 운명이라고 치부한다.

이미 초등학교를 들어가기 전부터 나는 혼자인 적이 많았다.

누가 시켜서 그런 것도 아니고, 내 의지도 아니었다.

이제는 다시 섭리를 받아드리기로 마음 먹었다.

인간에 대한 기대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애정을 준다면,

그 대상은 고양이나 사물이어야 마땅하다.



심히 방만한 자세로 앉아있는 게 찍혔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김찬중X배형민

2015. 4. 29





대체 얼마만의 이사란 말인가.

88년에 상도동에서 서초동으로 이주한 이래로 처음이니 대략 27년 만이다.

물론 아파트 재건축 때문에 3.X년간의 타지 생활이므로 27의 숫자는 앞으로 더욱 늘어갈 전망이다.

매년 집 뒤에서 봄을 알리던 목련과 벚꽃을 볼 수 없어 서운하지만

새로운 아파트 단지에는 어떤 나무들이 들어설지 궁금해진다.


이사 전날에는 잠을 잘 못 잤다.

마감에 대한 걱정 때문이기도 하고, 너무 오랜만의 이사라 두려움이 가득했다.

(2004-2007에는 네덜란드에 있었고, 그때도 이사를 한 번 했지만 짐이 아주 단촐했기 때문에

밴 택시 한 대로 해결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했다.)

한 서너시간 잔 것 같았다.

자기 전에 방바닥도 한 번 손으로 쓰다듬어 보고,

괜히 고맙다고 했다.

내가 매일 잠을 잘 수 있도록 지지해준 기반이니까...


이사는 생각보다 금방 끝났다.

나는 이사에 신경 쓸 여력이 없어서 고맙게도 형과 어머니가 대부분의 일들을 처리했었다.

운 좋게 멀지 않은 곳에서 전세를 구했고, 상도동과 이웃한 곳으로 가게되니 묘하기도 했다.

흑석동에서의 삶은 꽤나 낯설고, 신기하다.

맘에 드는 점이라면 단지가 조용하고, 깨끗하고, 열쇠 없이 살아도 돼서 편리하다는 점.

게다가 화장실이 두 개인 점이 가장 큰 기쁨일 것이다.

반포에 비해 공기도 맑고, 택배 수거하는 곳이 따로 있으며, 쓰레기 분리수거가 상시 가능하다.

단점이라면 가변형 벽체로 방음이 조금 취약하고, 11층에 살게 되어 뭔가를 잊어버리고 외출한다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게 곤욕스럽다는 것이다.

4층에 살 때에는 엘리베이터를 타서 올라가거나 내려갈 때 누군가 중간에 합승한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는데, 이제는 수시로 엘리베이터 난입을 감수해야 한다.

그리고 딱히 좋다, 아니다 얘기하기 어려운 것으로는 남향을 들 수 있다.

그동안 한 번도 정남향 방에서 살아 본 적이 없는지라 방을 가득 채우는 햇살은 상당히 낯선 환경이었다.

아직 커튼이 없는지라 오후 1시~5시에는 눈이 부셔 일을 할 수 없을 지경이다.

고층이라서 그런 건지 직사광을 한껏 받은 방의 온도는 쌀쌀한 봄이지만 꽤 후덥지근하다.


가장 불편한 점이라면, 역시 교통...

9호선이 연장되면서 배차간격이 너무 늘어졌고, 학교 가는 길이 매우 귀찮아졌다.

흑석역 주변은 차량과 사람 동선이 뒤엉켜 혼잡하고, 택시 잡는 일이 쉽지 않아 보였다.


이사 당일 저녁 늦게까지 원고를 마감하고, 

첫 밤은 역시나 잠을 설쳤고,

그럼에도 설계 수업을 하느라 무척 고되었지만

큰 탈 없이 이사를 마쳐서 다행이다.


27년간 익숙했던 풍경이라도 언제까지 기억될지 몰라 사진으로나마 담아보았다.

안녕, 한양아파트.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이 든다. 

공황증이라는 것은 이제 괜찮은가보다 안심하고 평범한 삶을 살고 있는데 너 나 모르냐며 길에서 어깨를 붙잡히는 상황과 같다. 아니 실은 케빈에 대하여의 틸다 스윈턴처럼, 그리고 더 헌트의 매즈 미켈슨처럼 불현듯 봉변을 당하는 삶이다. 이것은 일종의 천형이다. 내 일상을 가급적 예측 범위 내에 붙잡아 둔다면 별 일 없이 살 수 있을까? 낯선 만남의 가능성을 줄이고, 정신이 흐트러지지 않게 술도 금하고, 해 지면 바로 잠자리에 들고, 이런 금욕적인 삶을 통해서.

사실은 사랑을 주고 아픔을 나눌 누군가가 곁에 있다면 더 좋아질지, 아니면 그로 인해 더 악화될지 조금 궁금하기도 하다. 어찌되었든 요즘은 평소와 달리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는 복잡한 일과에 노출되었고, 무엇보다 7년만의 유럽 여행을 준비중이다. 

여행만큼 예측 불가능하고 스스로를 좁은 구석에 몰아넣는 행위도 없는 것 같다. 작년 봄의 간사이 여행도 무척 즐겁기도 했지만 밤이면 호텔에서 불안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약을 먹고, 일기를 쓰며 스스로를 달래느라 꽤나 고생이었다. 4년 전에는 운좋게 당첨이 되어 그렇게 그립던 네덜란드에 공짜로 가게 되었음에도 공황증이 도져 급하게 취소했던 전력이 있다. 

어쨌든 이번 유럽행에 대해서는 하루 정도만 더 진지하게 고려해야겠다. 이미 친구들에게 한 번 번복했던 사항이라 무릎을 꿇고 사과할 정도의 미안함이 가득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공황이라는 놈은 사람의 마음을 극한으로 몰고가는 무시무시함이 있어서 나도 나를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남은 주말, 오직 하나의 당면한 문제를 가지고 깊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예전에는 자살하는 사람을 두고 죽을 용기면 뭐든 못하겠는가 하는 모자란 생각을 가졌었는데 이제는 그게 절절히 공감이 된다. 그들은 진심으로 삶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나는 죽을 생각은 절대 없고 최대한 많은 도움과 조언을 듣고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자세이다. 심지어 큰 돈을 써가며 병원에서 석달간 치료/교육을 받은 적도 있다. 다만, 당시에는 놀라울 정도로 호전이 되었으나 그 이후 종종 이런 일이 발생한다는 슬픈 사정이... 그리고 예전에 비해 공황을 극복하는 기술도 만성이 되어서 그리 효과적이지 않을 때가 있다는 점이다. 

벗을 수 없는 족쇄, 빙의된 망자. 

정상적인 삶을 포기하게 만드는 이 고통은 절대로 다른 사람들이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

수렁 속에서 몸부림 치며 울고 싶어도 울지 못하는 사람은 나 하나로 족하다.

뭐 언제는 안 그랬냐마는 요즘도 모래 위에 쌓은 성처럼 위태롭다.

무엇보다 소화가 잘 안 돼서 생리통을 겪는 여성처럼 신경이 날카로우며

날씨까지 건조해져서 피부가 개떡인데, 속이 좋지 않아 약을 못 먹는 악순환이다.

단편을 쓰겠노라, 에세이를 쓰겠노라, 그림을 그리겠노라

선언만 하고 행동에 옮기질 않고 있는 와중에

지독한 감기로 단풍은 구경도 못했고 

여전히 학생을 가르치는 일에 큰 부담을 갖고 있으며

얼마전엔 학교에서 이력서를 제출하라 했는데

이렇다 할 활동이 없었던 관계로, 게다가 건축 설계로는 더더욱, 

자괴감의 늪에서 허우적댔다.

갑자기 울컥해서 언팔질을 하질 않나, 절친을 제외한 사람들의 연락을 귀찮아 한다.

마감을 한차례 끝내고, 다음 마감을 고민하기 전까지 대략 2주 정도 시간이 있는데

그동안 11월의 목표치를 달성할 수 있을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이럴 때면 각인된 기억처럼 베니스 palazzo grassi에서 봤던 전시가 떠오른다.

전시의 내용보다 더 머리를 때렸던 것은 전시의 제목이었다.

'where are we going?'


망망대해에서 표류하고 있는 이 화상은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태평양을 떠도는 후쿠시마의 잔해에라도 배를 대야 할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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